법정스님이 20대 국회의원들에게 전할 메시지는?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무소유(無所有)는 가진 것이 없음이 아니다. 불가에서 무소유는 집착을 벗어난 청정한 삶의 모습을 이른다. 불교의 초기경전인 <숫타니파타>에 무소유에 관한 말이 나온다.

자녀가 있는 사람은 자녀 때문에 기뻐하고, 소를 가진 사람은 소 때문에 기뻐한다. 그러나 자녀를 가진 사람은 자녀 때문에 근심하고, 소를 가진 사람은 소 때문에 근심한다. 인간의 근심 걱정은 집착에서 비롯되나니 집착이 없는 사람에게는 근심도 걱정도 없다.

가진 것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만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러나 가졌다고 생각하고, 그리하여 집착하며 그런 이유로 집착을 버려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면 중요한 것을 놓친다. 집착이 있기 때문에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집착과 싸워야 한다.

왜 그럴까? 우리는 여전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계속해서 가진 그것에 대해 무언가 해야 한다던지 혹은 가진 그것이 어떤 상태에 있어야만 한다든지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종종 가지고 있다는 것이 짐이 되거나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결국 집착을 버리는 것은 잡초의 이파리만 따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식의 삶은 대개 평생 집착하는 자기와의 투쟁으로 점철되게 마련이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근심스럽고 걱정스럽다. 결국 집착을 버리려는 노력이 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문제의 근원을 보아야 한다. 집착의 버림이 왜 필요한가? 가졌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무얼 가졌는가? 정말 자식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소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흔히 ‘가졌다’라는 것은 우리의 통제범위에 있을 때 가졌다고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우리의 심장이 우리 자신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는가? 손이나 발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무언가 해야 한다든지 어떤 상태에 있어야 한다든지 하는 생각과는 상관없이 돌아간다. 심지어 우리의 몸뚱이도 이럴진대 다른 것은 말해 무엇을 하겠는가? 결국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소유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고 있다. 소유란 “내 것이다”라는 뜻이 아니다. 소유란 말 그대로 ‘있는 바’다. 그냥 존재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자녀는 그저 있는 것이다. ‘내 것’이라는 것은 단지 상상에 불과하다.

그저 있기 때문에, 그것도 가까이 있기 때문에 존재와 존재간의 관계에 따라 우리는 무언가 할 필요가 생기고, 무언가 도움받아야 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할 일이 생기고 덕분에 우리의 존재가 유지되는 것이다. 소유는 그저 있는 것이다.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방법론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방법론으로는 영원히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문제는 깨닫는 것이다. 깨닫고 나면 이제 집착을 버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집착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삶은 투쟁이 아니다. 싸울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현자(賢者)들이 무소유를 강조했다. 이것을 “갖지 마라” 또는 “가지되 집착하지 마라” 정도로 해석하는 것은 그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쳐다보는 꼴이다. 성현들이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했던 것은 가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가지는 것이란 것 자체가 없다”는 뜻일 게다.

이것을 잘못 알아들으면 있는 바, 즉 자기 앞의 인연을 아무 이유 없이 제거하려고 무의미한 노력을 하거나 무언가 있는 것을 죄악시하게 된다. 심지어 자기가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도 죄악시하기도 한다. 이제 소유의 개념을 올바르게 가져야 할 것이다. 집착은 싸울 대상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출가수행자가 집을 떠나는 것은 집과 가족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 위함이다. 하지만 결국 그가 깨닫는 것은 집도 가족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뜻이 아닐는지? 숫타니파타에서 부처님이 무소유를 가르치고 있다.

우파시바가 물었다. “싯다르타여! 저는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혼자서 큰 번뇌의 흐름을 건널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의지해 건널 수 있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널리 보는 분이시여.”(숫타니파타 1069절).

거룩한 스승이 답한다. “우파시바여, 무소유에 의지하면서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으로 번뇌의 흐름을 건너라. 모든 욕망을 버리고 의혹에서 벗어나 집착의 소멸을 밤낮으로 살피라.”(1070절)

법정(法頂, 1932~2010) 스님은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궁색한 빈털털이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때 우리는 보다 홀가분한 삶을 이룰 수가 있다”고 정의했다.

청빈(淸貧)생활은 넘치는 부(富)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하다. 소극적인 생활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만족할 줄 모르고 마음이 불안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떤 어려운 일도 어떤 즐거운 일도 영원하지 않다. 모두 한 순간이다. 좋은 일도 그렇다. 좋은 일도 늘 지속되면 사람이 오만해진다. 덜 가지고도 더 많이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더 검소하고 작은 것에 기쁨을 느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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