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선거의 여왕’과 오만 그리고 불통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오만이란 방자하고 잘난 체하여 건방지다는 말이다. 그 ‘오만방자’한 것 때문에 사람도 조직도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을 많이 본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결코 오만하면 안 된다. 오만은 만병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오만은 치료가 불가능한 불치의 병으로 불행을 초래하는 지름길이다. 인간이 오만과 교만을 버리고 자신을 알고 분수를 지킨다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다. 그것은 자신의 행복을 찾는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삶을 찾는 거룩한 행위다.

옛날 명나라의 개국공신인 유기(劉基, 1311~1375)는 교만과 오만의 극치에서 참다운 사람으로 변신한 사람이다. 그 이야기의 제목이 ‘전무후무제갈무후’(前無後無諸葛武)로 앞에도 없고 뒤에도 없는 제갈공명이라는 뜻이다.

유기는 제갈공명을 과소평가했다. 자기는 천하통일을 하여 명나라를 세웠지만 제갈량은 삼분천하(三分天下)밖에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유기는 제갈량의 사당엘 가보았다. 사당 앞에 하마비(下馬碑)가 있는데 유기는 제갈량을 대수롭지 않게 보았기 때문에 하마비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지나치려고 했다. 그런데 하마비 앞에 이르자 말이 옴짝 달짝을 못하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유기는 말에서 내려 시자(侍者)에게 말발굽 밑을 파보도록 했다. 그랬더니 그곳에서는 유기를 훈계하는 듯이 “때를 만나면 천지도 모두 함께 힘을 도와주지만, 운수가 없으면 영웅의 계략도 있으나마”(時來天地皆同力 運去英雄不在謀)라고 쓰인 종이쪽지가 나온 것이다. 유기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갈량을 얕보았다가 당하고 난 유기는 얼떨떨한 속에 공명의 사당참배를 마치고 묘소를 찾았다. 그러나 유기는 곧 머리를 갸우뚱했다. 뒤편 제왕의 자리를 두고 그보다 못한 곳에 묘터를 잡은 공명을 역시 얕잡아 보고 참배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이번에는 무릎이 당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시자(侍者)를 시켜 그 자리를 파보니 “충신은 죽어서도 제왕의 곁을 떠나지 않는 법이다”(忠臣不離君王側)라는 글이 나왔다. 즉 “내가 어찌 묘자리를 모를까? 죽어서도 제왕을 모시기 위하여 이곳에 묻혔음을 알라”는 말이 유기의 귀에 들리는 듯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유기는 한숨을 푹 쉬었다. “유사 이래 현세에 이르기까지 공명만한 사람 없고, 역사가 이어지는 영원한 앞날에도 공명만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前無後無諸葛武侯)라고 말하고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지난날의 교만했음을 부끄럽게 여겼다고 하는 얘기다.

오만과 불통! 요즘 한국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다. 4.13 총선 논평에서 빠지지 않는 말이 오만과 불통 그리고 독선이다. 선거에서 참패한 것은 새누리당이지만 비판의 화살은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다. 왜냐하면 낯 뜨거울 만큼 노골적으로 ‘친박 비박’을 가려낸 공천파동 드라마의 총감독이 누구인지 국민들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선거의 여왕’은 이번 선거를 눈감고 싸워도 이길 것으로 자신했을지 모른다. 야당은 분열했고, 보수층인 60대 이상 인구는 증가했다. 조건으로는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박근혜’ 이름만 들어도 껌뻑 죽는 콘크리트 지지층 역시 여전하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것은 오만이었다. 그 오만의 결과는 역사에 길이 남을 여당의 참패다. 과반의석을 자신하던 새누리당은 원내 1당에서조차 밀려나는 수모를 당했다.

국민들은 우매한 중생들이 아니다. 오만한 사람에게는 매섭게 등을 돌릴 줄 아는 것이 국민의 힘이다. 그런데 여야당직자들을 불러 협치(協治)를 하자는 약속을 깨고 5.18노래, 청문회법 거부 등 최근 연이어 대결의 정치를 하는 모습에서는 아직 오만과 불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기 짝이 없다.

겸손은 자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태도를 말한다. 겸손하여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나 공덕(功德) 등 자신의 모든 것을 내세워 자랑하지 않는 태도다. 그리고 남을 높인다는 것은 남의 능력이나 공덕 등 모든 것을 높이거나 귀하게 평가해 줌으로써 칭찬하는 태도다. 심지어 남의 잘못이나 부족한 것에 대해서조차도 이해해주려는 너그러운 마음의 발현까지를 일컫는 것이 겸손이다.

겸손의 반대말로 교만, 거만, 오만, 자만 등이 있다. 옛날 한 나그네가 송(宋)나라에 갔다. 날이 저물어 여관에 들게 되었다. 눈치를 보니 여관주인이 첩(妾)을 둘이나 데리고 사는데 한 여자는 매우 미인이고 다른 한 여자는 못생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못생긴 여자가 여관주인의 사랑을 더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미인은 오히려 박대를 받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나그네는 여관주인에게 물었다. “여보 주인양반, 내가 볼 때에 그 여자는 못생겼는데 어찌 잘생긴 저 여자보다 당신의 사랑을 더 받고 있으니 궁금하오.” 그러자 여관주인이 답했다. “저 여자는 미인은 미인인데 스스로 미인인 체하기 때문에 나는 그 여자의 아름다움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 여자는 얼굴은 못생겼지만 제 스스로 못난 구석을 알고 처신하기 때문에 못생긴 것이 오히려 예쁘게 보이기 때문이지요.”

가끔 얼굴값을 한다고 시건방을 떠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지위가 좀 높다고 어깨에 힘을 주기도 하며 교만한 눈빛으로 남을 무시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별로 떳떳치 못한 돈푼이나 긁어모았다고 없는 사람 깔보거나 몇 푼 쥐어주고 나서 엄청난 일을 한 것처럼 우쭐해하는 사람도 있다. 또 글깨나 읽었다고 사람들 앞에서 거만을 떠는 사람도 있다.

안다는 것은 무엇이고 또 모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스스로 남보다 더 안다고 생각하면 오만해지기 쉽다. 그리고 스스로 남보다 더 모른다고 생각하면 겸손해질 수도 있다.

오만과 겸손은 많이 알고 모르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 오만의 끝은 멸망이다. 겸양 이상의 미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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