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선거철만 다가오면 떠오르는 얼굴, 이팔호 전 경찰청장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24년전 오늘 일이다. 이날 이른 아침 기자의 삐삐가 울려댔다. 발신번호는 558-1224, 서울 강남경찰서 기자실에서 온 것이다. 당시 기자는 사회부 사건기자로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강동구를 담당하고 있었다.

기자실로 전화를 걸었더니 최순금 여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죠?” “서장님이 직접 출입기자님들한테 연락하라고 해서 삐삐 친 겁니다.”

서둘러 집을 나서려는 순간 조간신문이 배달됐다.

‘안기부원 흑색유인물 살포’ ‘야 후보 비방 사무관 등 4명 붙잡혀’란 굵은 활자 제목에 1면 혹은 사회면 주요기사로 보도됐다. 기사 내용은 이랬다.

21일 0시30분쯤 안기부 직원 4명이 당시 야당 후보이던 홍사덕씨를 비방하는 유인물을 강남구 개포1동 주공아파트 우편함 등에 넣다가 발각됐다. 유인물에는 당시 민주당으로 출마한 홍사덕 후보를 비방하는 글이 적혀 있었으며 사무관을 팀장으로 하는 범인들은 모두 현장에서 붙잡혔다. 이들을 발견한 민주당 선거운동원들은 몸싸움 끝에 지구당사로 연행하여 자술서를 받고 이날 새벽 경찰에 넘겼다.

이른바 ‘안기부 직원 흑색선전물 살포사건’이다. 체포 당시 이들은 도청기와 무전기, 난수표와 함께 5공 인사와 민자당 의원 중 공천에서 탈락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후보 26명과 장관 등 정부부처 인사 11명, 기타 국영기업체장 16명 등 모두 83명의 명단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지닌 메모에는 이들의 집 번호로 보이는 전화번호와 이름이 적힌 연락망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는 결혼식을 일주일 앞둔 직원도 있었다.

사건 발생 직후 안기부는 이들이 안기부 직원인 것은 맞지만 흑색선전물 살포는 안기부와 무관한 일이라고 발표했다.

기자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미 잘 알려진 당시 사건을 다시 들춰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당시 이팔호 강남경찰서장의 역할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어서다. 그는 이날 밤 사건보고를 받은 뒤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당시는 민주화가 한창 진행되던 노태우 정부 말기였지만, 특히 안기부와 관련된 일은 성역과 다름없던 시절이다.

이팔호 서장은 서울경찰청 상부에 보고했다. “신분증과 증거물이 쏟아져 나왔다.?감출 수도 없고 감춰서도 안 된다. 내 책임 아래 처리하겠다.” 이 서장은 한밤 중 언론사에 일일이 연락을 하게 해 사건개요를 발표하고 기자들을 불렀다. 당시 20곳이 채 안되는 신문, 방송사와 통신사 기자들이 강남경찰서로 몰려들었다.

이튿날 첫 새벽뉴스부터 방송에서 이 사건보도가 나가고 신문들은 사건을?대서특필했다. 사흘 뒤 실시된 선거에서 야당 홍사덕 의원이 이 사건 직전 압도적으로 앞서가던 김만제 민주자유당 후보를 제치고 당선됐다.

이팔호 서장은 그후 9년 뒤 경찰 수장에 올라 붉은악마와 4강 진출로 한국을 세계에 널리 알린 2002년 한일월드컵 경호경비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정치권의 여러 제안을 모두 물리치고 경찰청장을 끝으로 어떤 公私의 직책도 맡지 않았다. 이따금 당시 안기부원들 명단과 이팔호 서장의 얼굴이 오버랩돼 온다. 이팔호 청장 같은 경찰총수를 갖고 싶은 것은 기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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