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서울대 교수 아들’이 12년만에 쓰는 ‘한겨레 기자 아버지’ 추모글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12일 오전 문래역 인근 영등포노인종합복지관에서 열린 시니어기자교육 프로그램에서 강의하기 위해 문래역에 내렸다. 3주쯤 전 강의 요청을 받았을 때만 해도 내가 1988년 기자생활을 시작할 때 매일 이용했던 곳이 문래역이란 사실이 그다지 실감나지 않았다.

그해 5월15일자 창간호가 나온 <한겨레신문>은 문래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양평동 허름한 공장 1, 2층을 빌려쓰고 있었다.

이날 아침 강의 자료를 한번 더 살펴보기 위해 컴퓨터를 켜니 ‘한겨레사우회보’ 25호가 이메일로 배달돼 있었다.

한겨레신문사 출신 7~8명이 4.13총선에 출마한다는 소식이 1면과 3면에 주요기사로 나오고,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서 반가운 이름이 얼른 눈에 띄었다. 한겨레신문 창간때 편집부의 기동으로 큰 역할을 한 심채진 선배 소식이다. 편집부는 말 그대로 취재부서에서 넘어온 △기사에 제목을 붙이고 △기사의 경중(輕重)을 판단해 기사 크기를 정하며 △레이아웃을 하여 독자들이 신문을 한눈에 쉽게 읽을 수 있게 하는 신문제작의 최후 공정을 담당하는 부서다. 당시만 해도 편집부는 기자들로만 구성된 편집국 내의 수석부서라고 호칭됐다.

나는 심채진 부장과 같은 시기에 편집부에서 근무한 적은 없지만, 그의 ‘(신문) 쟁이근성’을 무척 좋아했다. 목소리가 유난히 큰 경상도 사나이 심 부장은 ‘육봉 선배’로 불리우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아마 ‘육봉’은 한자로 肉峰이나 六峰이라기 보다는 肉棒에 더 가까운 뜻이 아니었지 않나 싶다. 그는 ‘심 부장’이나 ‘심 선배’보다 ‘육봉 선배’로 부르는 걸 좋아했던 것 같다.

그는 내가 한국기자협회 회장 시절이던 2004년 1월 별세했다. 그의 조문을 갔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아침 ‘한겨레사우회보’에 그의 아들(심병효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이 쓴 글을 발견할 줄이야.

육봉 선배의 약간 고음(高音)의 속사포(速射砲) 음성이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이상기씨, 요즘 잘 하고 있는 거지?” 하고.

심채진 선배의 아들이 아버지를 회억하며 쓴 글 전문을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2004년 1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 을 때 나는 미국에 유학 중이었다. 졸업을 얼마 앞두고 졸업논문을 마무리 짓느라 연구실에서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 늦은 저녁시간으로 기억되는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어머니께서는 차분한 음성으로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 말씀하셨다. 오랜 시간 투병을 하셨지만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줄은 몰랐다. 몇 개월 전 병상에 누워계시던 아버지께 빨리 박사학위 받고 돌아오겠노라고 말씀을 드렸을 때 나의 손을 꽉 붙잡고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셨는데…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떠나셨다. 텅빈 새벽의 시카고 공항에서 그리고 서울로 오는 비행기에서 한참 동안 서럽게 울었던 생각이 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벌써 12 년 전의 일이 되었지만 요즘도 가끔 아버지가 떠오른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을 때, 어떤 길이 옳은 길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을 때면 더 그렇다. 아버지라면 어떻게 판단하시 고 내게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셨을까? 힘들고 아플 때, 좌절을 겪고 있을 때 아버지는 내색하지 않고 평소처럼 나를 대해 주셨고, 무조건 이해해 주셨으며, 용기를 주셨다. 내게는 정말 큰 산 같은, 버팀목과 같은 존재였다.

이제는 직접 음성을 들을 수는 없지만 지금도 가끔 마음이 혼란할 때 아버지에게 마음 속으로 질문하곤 한다. 아버지가 조선투위 활동으로 해직 후 우리 집은 중산층의 삶에서 서울 변두리의 서민들이 사는 연립주택으로 생활환경이 바뀌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부천의 산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 기억에 남아있는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당당했던 모습이었다. 그리고 참 부지런하셨다.

새벽이면 아버지는 우리 삼형제를 깨워서 뒷산을 한 바퀴 돌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새벽에 잠에서 깨는 것이 정말 싫었지만 산중턱을 오를 때면 해가 떠오르고 기분도 좀 나아지고, 이럴 때면 아버지께서는 여러 이야기를 해주시곤 했다. 합천의 시골에서 보낸 어린 시절 얘기도 해주셨고, 조선일보 기자시절의 추억도 얘기하시고, 언론자유를 위해 보장된 안락한 삶을 희생하셨다고도 말씀하셨고, 비록 지금 조금 어렵지만 꿋꿋하게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말씀도 하셨던 것 같다. 그 모든 얘기를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가 정말 훌륭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 다. 한편으로는 어려운 가정형편에 대해서도 원망스럽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해직된 것이 30대 후반의 나이인데 한 가정의 가장으로, 세 아이의 아버지로서 직장에서 파면되었을 때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의 아버지의 나이를 훌쩍 넘긴 지금 30대 후반에 짊어져야만 했을 아버지의 삶의 무게가 얼마나 컸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아버지께서는 책을 정말 열심히 읽으셨고 밤늦게까지 신문을 읽고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기사를 오려서 스크랩을 하시곤 했다. 나에게는 과학, 수학책을 많이 사주셨는데 인문/사회계열로 가지 말고 이공학 분야를 공부하라는 말씀을 자주 하시곤 했다. 아마도 아버지와 같은 삶을 반복하지 말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공부를 잘했던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 나 역시 그런 아버지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아버지와 같이 거실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 가족을 괴롭혔던 가난도 아버지가 한국경제신문에 취직을 하면서 조금씩 나아진 것 같다.

낡은 연립주택에 서 12층 아파트로 이사를 갔고, 그 당시 유행하는 운동화도 구입할 수 있었고, 우리 가족은 가끔씩 외식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 한구석에는 제대로 된 언론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언론자유를 완성하고 싶다는 꿈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87년쯤으로 기억되는 어느 날 진보언론의 창간을 위해 새로운 도전을 하겠다고 말씀을 하셨을 때 나는 아버지가 많이 미웠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앉혀놓고 한참 동안 여러 말씀을 하셨는데 그 선택이 너무 싫었던 나는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선택이 싫었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아버지는 몇 년간 정말 배고픈 강행군을 하셨던 것 같다.

백두산 천지 사진이 찍혀져 나온 한겨레 창간호를 들고 기뻐하시던 아버지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아버지의 꿈이 조금은 이루어졌구나 하는 생각에 나도 많이 기뻤다. 나에게 나의 꿈이 있듯이 아버지도 아버지의 꿈이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꿈을 위해서 마지막 남은 정열의 불꽃을 태우신 것 같다. 지금의 한겨레가 있는데 아버지의 희생이 조금은 되지 않았을까 감히 생각해본다.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사람을 좋아하고, 술을 잘 드시고, 욕을 잘 하시는 맘 따뜻한 휴머니스트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진보적인 면이 많이 있으셨지만 아주 진보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경상도 시골의 보수적인 성향이 더 많았을지도) 인간미 있는 따뜻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고단한 삶이었으되 품위와 지조가 있었고 화려하지 않았지만 향기가 있는 삶이 아니었을까 생각한 다. 어려웠던 그 시절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런 사람의 온기가 있는 따뜻한 세상을 꿈꾸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삼형제는 2년 전 고향 땅 에서 안식을 취하고 계신 아버지에게 작은 비석을 만들어 드렸다. 조선투위에서 만들어 주신 비문은 다음과 같다.

모든 자유를 자유롭게 하는 언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온 생애를 바친 고 심채진 선생이 여기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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