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전무 출신 정녀 1회 ‘좋다 보살’ 공타원 조전권님을 소개합니다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회 명예회장] ‘좋다보살’이라는 별호(別號)를 가지신 분이 있었다. 원불교 회상 전무 출신 정녀(貞女) 1호였다. 자비와 덕화가 넘치는 불보살의 인품과 법열(法悅)로 충만한 이분은 설법을 잘해 설통제일(說通第一)이라 불렸다. 이 어른이 곧 공타원(空陀圓) 조전권(曺專權, 1909~1976) 종사시다. ‘좋다보살’ 공타원 종사님은 기독교 장로로 독실한 신앙을 하던 경산 조송광 선진의 4녀로 출생했다. 이런 환경에서 어려서부터 성서를 배우며 전도사가 될 꿈을 키우며 자랐다.
그래서 기독교학교인 전주 기전여고에 입학하여 예수의 사랑으로 조선 여성을 개화시키겠다는 꿈을 키웠다. 그러나 부친이 소태산(少太山) 부처님을 뵙고 제자가 된 사실을 알고 분개하여 마귀의 유혹에 빠진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원기12년(1927) 원불교의 전신(前身)인 ‘불법연구회(佛法硏究會)’를 찾았다가 오히려 새 부처님의 제자가 됐다.
공타원 종사 ‘좋다보살’은 일화가 많다. “키가 큰 사람을 보면 큼직해서 좋다./ 작은 사람을 보면 아담해서 좋다./ 야윈 사람을 보면 날씬해서 좋다./ 뚱뚱한 사람을 보면 푸짐해서 좋다./ 죽 같은 밥은 촉촉해서 좋다./ 된 밥을 해오면 고실 고실해서 좋다./ 짜면 짭짤해서 좋다./ 싱거우면 삼삼해서 좋다”고 했다.
그리고 좋다보살 공타원님은 누구한테든지 칭찬을 잘 해주셨다. 한 교무(敎務)님의 경종(警鐘) 치는 모습을 보고 “경종을 잘 친다” 하고, 또 누구에게는 “뒤 꼭지가 예쁘다”고 칭찬했다. 한 번은 동산선원(東山禪院)에서 빨래를 훔쳐가는 도둑을 봤다. 그 사람은 이웃에 사는 어린 학생이었다. 가난한 시절이다 보니 훔쳐간 것이었다.
며칠 후, 그 학생을 만나자 좋다보살은 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참 부처님같이 좋게 생겼다. 네가 착한 마음을 가지고 공부를 잘하면 큰 인물이 될 수도 있다”고 격려를 하셨다. 세월이 흘러 그 학생이 자라 군대를 제대하였다. 그때의 공타원님의 사랑을 가슴에 깊이 간직하며 살아온 그 청년이 공타원님을 찾아왔으나 이미 열반하신 후였다.
모든 것을 좋게 보는 것은 그대로 하늘의 도를 체(體) 받는 것이다. 하늘의 도에 순응하면 미운 것이, 싫은 것이, 나쁜 것이 없는 법이다. 그래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일러 우리는 ‘좋다보살’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중일아함경>에서 어느 제자가 부처님께 물었다. “부처님! 세상 사람은 제각각 직업을 갖는데 누구는 성공하고 누구는 실패하기도 합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지요?”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하지 않고,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니 실패를 하게 되기 쉽지.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온힘을 바친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성공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요즘 베이비부머들이 창업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들이 3년 안에 그 일을 접는 비율이 대단히 높다는 통계가 있다. 그러니 “살맛 난다”는 사람이 거의 없다. 가면 갈수록 살기가 더 괴롭고 팍팍하다고 한다.
대체로 사업을 성취하는 사람은 내 이익보다 상대를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하고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들이고,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하는 사람은 상대를 이롭게 하는 일보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부처와 보살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다만 어떻게 하면 중생을 행복하게 할까를 밤낮으로 고민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중생들 틈 사이로 들어가서 내가 조금 손해를 보고, 정신 육신 물질로 무조건 베풀며, 손과 발이 되어 헌신한다.
이런 사람은 항상 마음을 따뜻하게 쓰고, 하는 말과 행동에서 진실함이 묻어난다.
모든 일의 성패 여부는 그 사람의 마음에 달렸다. 미국을 방문한 한 중국 여류작가가 뉴욕 거리에서 꽃을 파는 할머니를 우연히 만났다. 할머니는 남루한 옷차림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나약한 모습이었는데 얼굴은 온통 즐거운 표정이었다. 여류 작가는 꽃을 고르며 할머니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할머니, 뭐가 그렇게 즐거우신가요?” 그러자 할머니는 한껏 미소를 띤 얼굴로 이렇게 답했다. “왜 즐겁지 않겠어요.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데요.” 여류 작가는 다시 물었다. “번뇌에 대해 마음 편히 생각하시는 재주가 있으신 것 같군요.” 그러자 할머니는 여류 작가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불행하다고 생각될 때마다 사흘을 기다린답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모든 게 정상으로 변해 있는 거예요.” 할머니의 답변은 여류작가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슬픈 일이 있을 때 사흘을 기다린다?” 얼마나 평범하면서도 철학적인 삶의 태도인가?
지금의 번뇌와 고통을 미래에 찾아 올 즐거움에 대한 믿음으로 녹일 줄 아는, 삶에 대한 긍정적 믿음, 우리도 어려울 땐 즐거움을 위해 3일만 기다려 보면 어떨까? 그 사이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잊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