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연의 사마천 한국견문록(31)] 벤담, 죄수 감시 ‘원형감옥’ 고안···푸코 “사회체제는 거대한 정보울타리”

[아시아엔=이석연 전 법제처장] ‘안과 밖이 하나가 되면 일의 겉과 속이 없어진다’는 것은 상당한 유혹이다. 그 말은 안과 밖이 하나가 되는 일처럼 우리가 합심해서 호해를 왕으로 삼는다면 겉과 속이 없어지듯 우리가 한 일에 대해 사람들은 시비是非를 거론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안과 밖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계기는 서로에 대한 신뢰보다는 ‘정보’라는 끈에 있다.

정보는 남의 약점이다

사실, 이사는 정보의 역할에 대해 아주 잘 인지하고 있었다. 이사가 초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와서 여불위의 주선으로 진시황에게 유세할 기회를 얻었을 때 첫 번째로 한 말이 “다른 사람에 의지하는 사람은 기회를 놓치지만, 큰 공을 이루는 사람은 남의 약점을 파고들어 밀고 나갑니다”였다. 여기서 ‘남의 약점’이란 바로 정보를 의미한다.

대체로 약점이란 숨기고 싶은 것들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정보를 캔다’는 말의 뜻은 땅 속에 숨겨진 것을 캐내듯 상대의 약점을 밝혀내는 일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이사는 진시황에게 정보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당장 주변의 제후국을 진압하지 않는다면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사가 진시황을 설득하는 과정은 조고가 이사를 설득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정보는 곧 기회이며, 그 기회를 잃으면 후회한다는 조고의 논리는 곧 이사의 논리이기도 하다. 조고와 이사의 공통점은 정보가 기회이고 힘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며, 둘의 차이는 조고가 현실론자라면 이사는 명분론자라는 것이다. 명분론은 현실론의 논리를 압도할 수 없다.

결국 이사는 “아! 나 홀로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죽을 수도 없으니. 어디에 내 목숨을 맡기라?”라는 한탄과 함께 조고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세 사람은 공모하여 시황제의 조서를 위조했다. 내용은, 호해를 태자로 세운다는 것과 함께 10년 동안 국경에 있으면서도 이렇다 할 공로가 없는 부소와 몽염은 자결하라는 것이었다. 호해가 보낸 사자의 편지를 받은 부소는 몽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며 자결했다. 몽염이 자결을 하지 않으려 하자 사자는 그를 옥에 가뒀다.

호해가 왕이 되자 조고는 시황제의 죽음을 널리 알리고, 조정의 실권자가 되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그의 횡포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까지 남길 만큼 대단했다. 조고는 호해에게 참소해 이사를 죽이고, 결국에는 호해까지 모살謀殺을 했지만 결국 부소의 아들 자영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정보의 파놉티콘(Panopticon)

정보가 권력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정보 자체가 타인에 대한 통제와 감시의 기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벤담은 죄수들의 행동을 효과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파놉티콘(Panopticon)’이라는 원형감옥을 고안했다. 파놉티콘은 ‘모두’라는 뜻의 그리스어 ‘pan’과 ‘보다’라는 뜻의 ‘opticon’이 합쳐진 합성어다. 벤담이 고안한 원형감옥은 건물 중심에 탑이 하나 있고, 그 탑 안에서 간수 한 명이 죄수 전체를 감시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었다. 간수가 있는 탑 안은 어둡고, 죄수들이 갇힌 독방은 환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죄수들은 늘 ‘보이지 않는 감시’의 시선을 느낄 수밖에 없다. 벤담이 고안한 파놉티콘은 한꺼번에 모든 것을 조망할 수 있는 아주 합리적인 감시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이러한 감시 시스템이 감옥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작동되고 있다고 주장을 해 주목을 받았다. 푸코는 파놉티콘 안에 갇힌 죄수들은 보이지 않는 감시자들이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는 심리적인 부담감으로 인해 외부의 강압적인 통제 없이도 자기 스스로가 자신을 교화시킨다고 했다. 즉, 자발적으로 순종적인 인간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감옥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푸코가 제기한 문제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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