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연의 사마천 한국견문록32] 정보독점 전두환·조고 vs 정보공유 한장유·스피노자 과연 누가 역사의 승자?
[아시아엔=이석연 전 법제처장] 조고와 전두환 전前대통령은 핵심정보를 선점해 권력을 획득했다. 권력의 획득과 유지를 위해서는 타인에 대한 통제와 감시가 필요하다. 통제와 감시는 정보의 주요기능이다. 다시 말해 정보란 파놉티콘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급정보를 획득하는 것은 권력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받는 것이며, 동시에 그 권력을 유지시켜줄 수 있는 통제와 감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정보는 정보소유자의 선악을 판단하지 않는다. 여기에 정보의 위험성이 있다. 정보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활인검活人劍이 될 수도 있고, 사인검死人劍이 될 수도 있다. 조고와 전두환 전前대통령의 정보 선점이 활인검이었는지 사인검이었는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강노지말, 크로노스와 흉노의 시간
강력한 쇠뇌도 끝에 가서는 아주 얇은 노나라의 비단조차 뚫을 수 없고, 회오리바람도 그 마지막 힘은 가벼운 기러기 털도 움직일 수 없다. 처음부터 강력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끝에 가서 힘이 쇠약해지기 때문입니다._「한장유열전」
시간이란 형체가 없다. 그저 의식적으로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고 인지할 도리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간의 모습을 애써 형상화시키기도 한다. 시간의 신으로 알려진 크로노스(chronos)는 서양의 조각이나 화화에 낫과 모래시계를 들고 있는 날개 달린 노인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날개는 시간의 영원한 흐름을 의미하며, 모래시계는 인간의 운명처럼 시작과 끝이 있는 유한의 시간을 나타내고, 낫은 생명을 앗아가는 시간의 포악한 성질을 상징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을 크로노스와 카이로스(kairos)로 구분했다. 카이로스는 객관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하루가 24시간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객관의 시간이다. 카이로스는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개별의 인간이 무엇인가를 성취하거나 창조해내는 특별한 시간이다. 1년=크로노스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붙었을 때 느끼는 희열이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반면 크로노스의 시간은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묵묵히 흘러가 결국에는 모든 생명체에게 죽음을 선사한다.
우리가 느끼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바로 크로노스에 대한 공포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다. 크로노스의 시간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보다 다채로운 카이로스의 시간을 영위하는 것이 현명한 삶의 모습이다. 늙음을 인정할 때 보다 활기찬 젊음을 누릴 수 있다. 죽을 때까지 청춘일 수는 없다.
유방이 한나라를 세운 후 가장 골칫거리였던 것이 바로 흉노였다. 유방은 흉노와의 전쟁에서 패해 죽다가 살아났다. 유방은 흉노에게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어 대신들에게 그들과 다투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겨 강조했다. 대신들은 유방의 유언에 대해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논쟁을 벌였다. 온건파였던 한장유는 흉노를 치는 것은 그들과 화친하는 것만 못하다고 주장을 했다. 말을 타고 수천 리 밖에 있는 흉노를 찾아가 싸우게 될 때쯤이면 한나라의 군사와 말은 지칠 것이 당연한데 그 상태로 싸우게 된다면 패할 수밖에 없다는 게 한장유의 주장이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아무리 강력한 화살이라도 그 끝에는 힘없이 떨어진다는 ‘강노지말强弩之末’의 비유를 통해 전개했다. 한장유의 논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찬성을 하자 황제 무안후는 흉노들과 화친을 허락했다.
처음부터 강력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끝에 가서는 힘이 쇠약해진다는 한장유의 말은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인지를 잘 알려주고 있다. 세월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은 시간의 허무함에 대한 한탄과 회한을 드러내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시간의 허무함만을 생각하다보면 주어진 삶을 의미 있게 살 수 없다. 허무주의를 지칭하는 니힐리즘(nihilism)의 어원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허무주의자들의 특징은 사람이란 어차피 다 죽기 마련인데 뭐 그리 아등바등하며 사느냐며 주변 사람들의 성실한 생활을 비꼰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모든 것을 죽음으로 몰고간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러나 그 운명이 현재의 삶을 지배할 수는 없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던 스피노자의 모습이 숭고해 보이는 이유는 죽음이라는 운명 앞에서도 카이로스의 시간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삶이란 크로노스의 횡포에 의해 지배되는 감옥이 아니라 카이로스의 시간에 의해 가꾸어지는 의지의 꽃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