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2일]나치, 17세 프랑스 레지스탕스 총살(1941년)

2008년 인도, 달 탐사위성 ‘찬드라얀 1호’ 발사 성공

2008년 10월22일 인도 최초의 달 탐사위성 ‘찬드라얀 1호’가 22일 오전 발사에 성공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가구야’, 중국의 ‘창어 1호’에 이어 세번째 성공이었다.

인도 우주연구소(ISRO)는 이날 오전 6시22분(현지시각) 사티시 다완 우주 센터에서 찬드라얀 1호를 자체 개발한 극위성발사체 PSLV-C11에 실어 우주로 쏘아 올리는 데 성공했다.

산스크리트어로 ‘달 탐사선’을 의미하는 ‘찬드라얀’ 1호에는 자체 기술로 개발된 5개 핵심 장비 이외에 미국과 독일, 영국, 스웨덴, 불가리아가 개발한 6종의 장비가 탑재됐다. 달 궤도에 진입한 뒤 2년간 달 주위를 돌며 3차원 달 표면 지도와 광물·화학 지도를 제작하기 위한 데이터를 수집할 예정입니다.

인도는 찬드라얀 1호 발사를 자신들의 뛰어난 우주과학 기술을 전세계에 알리는 한편 일본과 중국에 한 발짝 뒤쳐져 있는 아시아 우주개발 경쟁에 고삐를 죄는 계기로 삼는다는 계획입니다.

인도는 당초 2010년 발사를 목표로 달표면 탐사선인 ‘찬드라얀 2호’를 제작중이었는데, 이 계획이 2014년으로 연기됐다. 러시안 착륙선 완공 여부에 따라서는 2016년으로 미뤄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1990년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 사망

1990년 10월22일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Althusser, Louis)가 프랑스 베리에르의 한 병원에서 72세로 작고했다. 알튀세르는 정신분석학의 자크 라캉, 문학이론의 롤랑 바르트, 철학의 미셸 푸코, 인류학의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1960년대 프랑스 지식인사회의 구조주의 열풍을 이끈 사람이다.

그의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 또는 반(反)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는 촘촘하고 현란한 논리로 당대 프랑스학계에서만이 아니라 1980년대 말 이후 전 세계 좌파 학계에서도 또렷한 그림자와 메아리를 얻었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전기 저작들과 후기 저작들 사이에는 ‘단절’이 있다. 그 단절은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와 반(反)인간주의적 마르크스 사이의 단절이었다.

대학 교수가 되지 못하고 모교인 파리 고등사범학교의 철학교수시험 준비반 지도 강사로 이력을 마친 알튀세르는 글쓰기 못지않게 삶을 통해 프랑스 지성사를 요란하게 만들었다. 그의 삶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은 1980년 11월16일 아내 엘렌을 목졸라 죽인 일이었다. 제자인 니코스 풀란차스가 자살한 이듬해에 일어난 이 사건은 철학자 알튀세르의 실질적 죽음이라 할 만했다.

알튀세르는 정신착란 상태에서의 살인이라는 이유로 면소판결을 받은 뒤 10년을 더 살았지만, 주로 병원과 요양원에서 보낸 그 기간에 철학 작업은 없었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이 시기에 남은 힘을 추슬러 자서전 ‘미래는 오래 계속된다’를 집필했다. 이 책은 그가 죽은 뒤인 1992년에 출간됐다.

1967년 미 워싱턴, 베트남전 반대 시위

1967년 10월22일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대규모 반전 시위가 벌어졌다,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링컨 메모리얼(Lincoln Memorial) 건물 앞에 모여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을 비난한 것이다. 시위대는 링컨 메모리얼에서 집회를 끝내고 국방부 건물로 행진했다. 이 과정에서 무장한 군인들과 충돌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한다.

하루 전 21일부터 시작된 이 반전시위는 23일까지 사흘 동안 계속됐다. 이 기간에 모두 683명이 체포됐다. 이 같은 반전시위는 일본과 서부유럽 여러 나라에서 동시에 전개됐다.

이후 고엽제 살포, 양민학살 등 베트남전쟁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반전시위의 물결은 더욱 거세진다. 특히 1969년 10월 15일 ‘베트남 반전의 날’에 워싱턴을 중심으로 미국 각지에서 일어난 시위가 가장 큰 반전시위로 기록됐다.

1941년 나치 17세 레지스탕스 총살

1941년 10월22일 르와르-아틀란티크에 있는 샤토브리앙에서 27인의 레지스탕스 포로들이 점령군 장교에 대한 암살에 대한 복수로 총살됐다. 이들 27명은 총살집행 때 눈을 가리는 것을 거부했다. 공산주의 레지스탕스들은 총탄에 쓰러지기 전 “프랑스 만세”를 외쳤다. 이들 중 가장 어린 사람은 17세의 기 모케(Guy Moquet) 였다. 그의 편지가 나중에 공개됐다.

2007년 9월19일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은 기 모케의 처형 장소를 방문했다. 사르코지는 기 모케의 기일인 10월22일 이 편지를 전국의 모든 고등학생들에게 읽게 했다.

“사랑하는 엄마, 아끼는 나의 동생, 존경하는 아빠. 나는 죽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특히 엄마께 바라는 것은 용기를 내시라는 것입니다. 나는 나보다 먼저 간 이들의 길을 따르길 원했고, 그들을 따를 뿐입니다. 당연히 나 자신도 살기를 원하지만, (지금)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나의 죽음이 헛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쟝(Jean)과 작별인사를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나의 형제 로저(Roger)와 리노(Rino)와는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쟝과 인사를 할 수 없었던 것이) 얼마나 한스러운 일인지. 나의 유품들은 모두 세르쥬(Serge)에게 전해져 그가 훗날 나의 유품을 지니며 나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 나의 아빠! 엄마께 한 것처럼 모든 고통을 주게 되는군요. 마지막 인사를 보냅니다. 단지 나는 당신이 이끌어 주신 대로 최선을 다했음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나의 친구들과 훗날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학업에 정진하는 사랑스런 나의 동생에게 인사를 보냅니다. 열일곱 살 반, 내 생은 너무나 짧았습니다. 여러분들과 이별을 해야 하는 것 말고는 어떠한 후회도 없습니다. 나는 탕탕(Tintin), 미쉘(Michels)과 같이 처형될 것입니다. 엄마, 당신께 바라는 것은 용기를 내어 이 고통을 이겨내겠다고 내게 약속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길게 쓸 수가 없군요. 나는 당신들 모두를 떠납니다. 엄마, 세르쥬, 아빠. 용기를 내세요. 모든 이들에게 나의 작별 인사를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보냅니다.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당신들의 기(Guy).

추신: 남아있는 모든 이들에게.

(곧 처형당할 스물 일곱명의) 우리를 자랑스럽게 여겨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27인 곧 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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