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연의 사마천 한국견문록 33] 전세계 청년들 가슴 들끓게 한 체 게바라의 한마디
박수 받으면서 떠나는 대통령이 없다···소통의 시작은 직언이다
[아시아엔=이석연 전 법제처장]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이 그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일 때 사람들은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른다”며 힐난한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 힐난을 받는 사람이나 힐난을 하는 사람이나 각자의 주관만을 내세워 서로의 관계가 이전과는 달리 복잡하고 소원해지기 마련이다.
내가 내 능력으로 성공했는데 당신들이 뭔 상관이냐며 목소리를 높이는가 하면, 당신의 성공이 당신 혼자만의 노력으로 된 게 아닌데 왜 혼자 잘난 척하냐며 서로가 다투는 일들을 일상의 주변에서 흔히 보게 된다. 이런 갈등은 마치 인간사의 당연한 흐름처럼 여겨져 이럭저럭 넘어가려는 일이 빈번한데, 나는 그런 수동적 세태世態가 심히 염려된다. 갈등은 분열을 낳고, 분열은 증오를 낳기 때문이다. 증오가 인간관계를 파멸로 이끄는 동인動因이라는 것은 인류역사를 통해서 누차 확인해왔던 바다.
삶에서 초지일관初志一貫의 자세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인간이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완전하기 때문에 인간은 완전을 꿈꿀 수 있다. 일관 그 자체를 실현할 수 없지만 일관의 경지로 나가려는 ‘노력’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위대성을 찾을 수 있다. 대립과 갈등으로 반목하지만 궁극적으로 소통을 통해 완전을 꿈꾸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늘 대립하고 갈등할 수밖에 없다는 체념의 철학은 역사의 독이 될 수밖에 없다. 체념하는 자에게는 꿈도 미래도 역사도 없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라는 혁명가 체 게바라의 외침이 전 세계 청년들의 가슴을 들끓게 했던 이유는 바로 불완전하기에 완전을 꿈꿔야 한다는 강력한 전언傳言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현실을 직시하면서 미래의 꿈을 개진하려는 자세를 가질 때 비로소 소통의 통로가 열릴 수 있다.
그렇다면 소통이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해 서로 이해하고 양보해서 적절한 접점을 찾는 것이라고 말들 한다. 물론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설명이 공허해서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는 거다. 양보와 접점이라는 메시지가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구체성이 없어 빈껍데기처럼 느껴지는, 그야말로 초등학교 교과서에나 나오는 헐렁하고 맥없는 계몽의 말 같아 성에 차지 않는 게 문제다.
소통의 길은 양보가 아니라 바로 ‘직언直言’에서 출발한다. 직언이 없는 사회는 암흑의 상황과 같아 모든 관계가 ‘불통不通’의 연속이 될 수밖에 없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밝히려는 의지가 없다면 지도자와 국민,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등등 모든 관계들이 불통의 고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고, 결국에는 증오의 불길만 남아 서로의 마음에 상처만 남기게 된다.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할 때 소통의 문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