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 독립투사 김원봉 고문한 노덕술과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일란성쌍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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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최규하 대통령은 헌정의 파괴를 막지 못한 대통령으로 제2공화국의 장면 총리와 더불어 부정적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그는 계엄사령관 정승화 총장의 연행을 재가한 시간을 명기하여 계엄사령관을 연행하는 엄청난 일이 대통령의 재가가 떨어지지 않은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당시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항거였다. 보안사령관이 중요사항에 대한 대통령에 직보하는 것은 관행인데 최규하 대통령이 이를 잘 몰라서 12.12의 혼선이 일어난 것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박정희 정권에서는 참모총장은 말할 것도 없고 국방부장관도 보안부대의 관찰대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통령의 재가가 떨어지지 않은 가운데 합수본부장의 임의에 의한 계엄사령관의 연행도 관행이었는가?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최규하는 이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자유당 정권의 특무대장 김창룡이 김영삼 정부 시절 대전 국립현충원에 이장된 것은 정권의 역사의식이 천박함을 폭로하는 이외 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은 김창룡이 무슨 일을 했는지, 무슨 평가를 받았는지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관동군 헌병 오장 출신의 그는 ‘빨갱이 잡는 선수’였다. 1951년에서 1956년까지 특무대장을 한 김창룡은 이승만의 신임을 배경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들은 정치군인의 효시였다. 그를 살해한 허태영이 사형당했을 때 국민들이 오히려 애통해 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를 이끌어 좌파 민족주의자의 대표라 할 김원봉이 1947년 2월 남로당에 연루됐다고 붙잡혀 종로경찰서 사찰과장 노덕술에게 모욕을 받고 사흘을 울었다고 한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악랄하게 고문하던 노덕술은 해방당일 민중에 의해 사지가 찢어졌어야 할 부일역도(附日逆徒)였다.

김근태를 고문한 이근안이 바로 노덕술의 재현이라고 보면 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김원봉이 1948년 남북협상 후 북한에 남은 것은 이런 조국에 실망했기 때문이다. 친일파 청산은 초기에 잘못되었다고 한다. 청년들에게 징병을 피할 수 없다면 일본군에서 군사지식을 익혀두는 것이 독립에 도움이 될 것이란 고언을 쓴 이광수는 친일파로 비난하면서 독립운동가를 고문한 노덕술은 살려두어 공산당 잡는 도구로 활용하는 무분별한 친일파 청산이 오늘의 혼란을 낳았다.

일본군에 학병으로 끌려갔던 사람, 일본군에 배운 군사지식으로 대한민국을 구해낸 장군, 한일합방 후 강제로 작위를 받았으나 그 자손은 습작을 거부했던 집안, 허울만의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었으나 실제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을 뭉뚱그려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은 어리석다. 이들보다도 정말로 일본 식민통치의 조아(爪牙)가 되었던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을 가려내야 한다. 이것은 히틀러 치하의 독일군 장군 롬멜, 룬트슈테트와 나치스의 히믈러, 유태인 인종청소의 아이히만을 구분하는 것과 같다. 김창룡, 노덕술 등 부일역도와 이광수, 김성수 등 고난 하의 국내 민족지도자를 구분 못하는 어리석음이 ‘역사 바로 세우기’가 실패한 이유다. 김창룡을 성스러운 현충원에 안장한 것은 이를 웅변으로 보여준다.

최규하에 대한 평가가 달라져야 하는 이유는 역사를 바로 세우는 데는 냉정하고 엄격한 기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미숙한 국회의원들의 떼법으로 국정이 운행되어서는 안 되듯이 역사 바로 세우기도 미숙한 자들의 경망(輕妄)으로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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