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개혁엔 적재적소 인재가 필수···전두환 육사11기 동기 김성진 발탁 ‘반면교사’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밴 플리트 장군은 ‘한국의 웨스트포인트’를 만들기 위해 전쟁 중에도 최고의 인재를 모았다. 4년제 육사는 이전 육사와 전혀 달랐다. 졸업생의 자부심은 남달랐다. 1기생들은 처음 1955년생 졸업생으로 불리다가 1970년대에 11기가 되었다. 1기생 중에서 김성진 생도는 스타였다. 인천중학교 출신의 김성진은 입교에서부터 졸업까지 줄곧 수석이었다. 그의 답안지는 고치는 것이 없었다. 육사 소개영화를 비롯하여 모든 영광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는 제헌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나 고시 3관왕 장덕진, 6공의 스타 정해창과 같은 ‘공부의 선수’였다.

졸업 후 첫 동기회에서 골키퍼 전두환이 올라섰다. 전두환은 “지금까지는 김성진 동문을 중심으로 되어 왔지만 이제부터는 원점에서부터 시작이다”라고 했다. 김성진은 황당했지만 성실한 그는 “그럴 수도 있다”고 수긍하였다. 4.19당시 김성진은 송요찬 참모총장 부관이었다. 흔히 석두(石頭)로 알려진 송요찬이 칼빈으로 무장한 경찰에 M-1 총탄을 보내도록 하여 살상을 막는 탁월한 상황처리를 보고 ‘공부의 선수’ 김성진은 “장군은 타고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에 빠져 야전에서 학문의 길로 들어선다. 그는 위탁교육에서 처음 서울대 사학과를 다녔으나, 물리학과를 거쳐 기계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골치 아픈 선비보다는 안일한 엔지니어가 된 것이다. 박정희는 국방과학연구소를 창설하여 일본육사 선배 신응균에 맡겼다. 신응균은 김성진을 발탁했다. 김성진은 이공계통의 수재인 육사교관들을 끌어 모았다. 이병형, 이재전 장군이 자주국방의 전략적 토대를 세웠다고 하면 자주국방의 기술적 토대는 이들이 세운 것이다.

1971년 북극성동창회장 선거에서 김성진은 하나회에 반대하는 교수부의 촉망을 받아 출마했다. 그러나 김성진은 “이제 우리 동문은 전두환 동문을 중심으로 나아가야 된다”면서 자진사퇴함으로써 전두환이 다시 동창회장이 되었다. 전두환은 이미 1968년 동창회장을 지냈고 그때까지 동창회장은 단임이었다. 전두환의 북극성 동창회장 중임은 우연히도(?) 박정희가 3선 개헌을 하던 때와 겹쳤다. 그 이후 전두환의 승승장구는 모두 아는 바와 같다. 12.12 후 전두환은 김성진을 안기부 차장으로 임명하여 보은했다.

레이건은 1981년 전두환을 초청하여 신군부의 집권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한국의 핵과 미사일 관련 능력을 제거할 것을 요구했다 전두환은 김성진을 국방과학연구소장으로 임명하여 이와 관련된 업무를 맡겼다. 김성진은 관련 부서를 모두 해체했다. 박정희, 신응균이 길러놓은 귀한 인재는 이때 흩어졌다. CIA의 리처드 로리스는 이를 철저히 감시했다. 가난뱅이 북한이 핵과 미사일에서 붕붕 뜨고 있는데 세계 10대 경제기술대국 한국이 헤매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김성진이 타계한 지 벌써 상당한 세월이 지났다. 동기생 강재륜은 아직 생존해있고 그의 철학개론서는 탁월한 명저다. 김성진의 저서는 남아 있지 않으며 그를 기억하는 동문은 별로 없다. 그저 육사 11기 수석일 뿐이다. 우등생이 국가사회에 기여하는가? 답은, “이들을 어떻게 키우고 활용하는가”는 대통령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개혁은 한다고 하는데 주도세력이 없다고 걱정한다. 관료는 도구다. 도구는 사람이 쓰기에 달려 있다.

인재는 드물지만 어느 시대고 있다. 그들을 쓰는 것은 지도자에 국량(局量)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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