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들의 새로운 인생 스토리 “가지 않은 길을 걸어보라”
성공한 1% 앞에서 기죽는 청춘이여,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어보라
[아시아엔=김서권 예수사랑교회 담임목사] “나는 이제…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모든 생각이 부정당하는 또 다른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두렵고 외롭다.”
신병교육을 마치고 첫 휴가를 나와 복귀하기 전날 밤 쓴 어떤 청춘의 메모 한 줄이다. 그다지 넉넉하진 않지만 가족들의 사랑 속에서 밝고 건강하게 자라 엄친아가 다닌다는 일류대에 무난히 들어가, 트로트와 랩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가창력으로 노래방을 한 순간에 장악하는 음주 가무의 종결자, ‘별일 없이 사는’ 명랑 캐릭터인 그의 단상(斷想)치고는 의외다.
아프니까 청춘이고 넘어지니까 청춘이고 보이지 않는 미래가 두려우니까 청춘이라고 다독이고 싶지만, 빛나는 아름다움이라고 말하기엔 그들의 숨겨진 이야기가 때로는 너무 어둡다. 인생시계로 이제 겨우 아침 7시인데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말하기엔, 당장 삼각김밥 살 돈도 없으니 안타까울 때가 있다.
등록금을 벌기 위해 학교를 휴학하고 하루 16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검증되지 않은 건강 보조식품이나 신약개발 프로그램의 인간 마루타로 나서는 이 시대의 청춘들. 밤새워 일하는 편의점 일이 너무 힘들어 노래방 도우미로 나서볼까 아니면 촛불 들고 광화문으로 나가볼까 갈등하는 보통 청춘들. 명문대에 유학 스펙까지 패키지로 갖춘 모범가장, 일류대 교수님의 부드러운 멘토링에 열광하는 것은 그래도 그들의 마음을 속속히 알아주는, 찾아보기 드문 기성세대이기 때문이리라.
스님은 마음을 비우라고, 신부님은 착하게 살라고, 목사님은 예수님 잘 믿어야 천국 간다고 말하니 종교도 당장은 답이 아닌 것 같다. 서점을 뒤덮은 자기계발서는 지금 당장 뭔가를 실행해야 한다고 결단을 촉구하지만 성공한 1% 앞에서 이 시대의 청춘들은 늘 기가 죽는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탈출구는 있다.
귀여운 아이유가 “나는 요~, 오빠가 좋아요” 삼단 고음으로 노래 부르면 60만 대군이 환호하고, 소녀시대의 S라인 몸매는 한 여름의 아이스크림보다 온 몸을 싱그럽게 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영원한 행복과 위로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그래서 때로는 위험하다. 이들이 청춘이다. 아프디 아픈 청춘, 아니 휙 가버린 청춘, 그 시절이 그리워 젊은 영혼들, 특별히 소외된 이웃과 후대들을 사랑하며 살아온 목사로서, 이들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해왔고 목하 고민중이다.
성경 속 성공한 청년들…야곱·요셉·다니엘
기독교를 ‘개독’이라 폄하하고 목사를 ‘먹사’ 꼴통 취급하는 청춘들이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의 말이 때로는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젊은이들 이야기가 꽤 많이 나온다. 한 여자를 깊이 사랑하여 20년을 하루 같이 종살이하고도 돈 한푼 못 받고 쫓겨날 뻔했던 야곱, 의붓형들의 질투심 때문에 죽을 고비 겨우 넘겨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던 요셉, 형들보다 늘 띨띨해서 양치기에 치즈도시락 심부름만 다녔던 다윗, 어린 나이에 전쟁포로로 잡혀가 사자굴과 풀무불에 던져질 위기에 처했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집도 직업도 다 버리고 현상수배범 엘리야를 멘토로 섬기며 따라 다녔던 엘리사 등등.
자신의 의지와 소원과는 상관없이 밀려오는 험악한 환경과 인간관계의 위협 앞에서 이 청춘들은 어떻게 살았길래 갑부가 되고 국무총리가 되고 왕이 되고 최고의 공무원이 되었으며, 시대를 리드하는 최고의 지성(知性)과 영성(靈性)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답은 딱 한 가지다. 이 한 가지를 제대로 안 가르쳐 줘서 기독교가 욕 먹고 목사도 말만 거창한 이중인격자로 전락한 것이다.
70억 인구, 그 누구도 예외 없이 갖고 태어나는 운명 사주팔자라는 개인의 스토리는 속세를 떠나 머리 깎고 깊은 산속 암자에서 바람소리 들으며 살아도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법정 스님은 말빚을 지고 가야했다.
이 사주팔자 스토리를 고쳐보려고 용하다는 무당 찾아가 천만원짜리 살풀이굿에 부적을 덕지덕지 붙이고 다녀도 안 되는 건 안 된다. 그래서 무속인들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당 팔자, 그 스토리 그대로 사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만 열심히 다닌다고 깨진 인간관계가 회복되고, 죽고 싶은 환경이 입맛대로 변할까? 천만의 말씀이다.
광활한 우주 공간 위에 푸른 별 하나 띄시고 한 손으로 정확하게 돌리시는 창조주 하나님, 그분이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히스토리(history) 즉 역사 ‘히즈 스토리’(His story)라고 부른다.
창조주의 스토리 속에 개인의 스토리가 들어가면 비로소 운명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스토리가 시작된다. 그 길을 가르쳐 줘야 하는 것이 목사의 사명이고, 교회의 역할이며 성경의 주제다.
이 한 가지를 똑 부러지게 가르쳐주지 않고 사람의 동기나 기준, 행동윤리나 교리로 애매하게 버무려버린 것이 곧 ‘종교화된 기독교’다. 운명이란,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우리의 생각을 가로막는 이 세상 신(神), 어둠과 공허와 혼돈의 주관자, 때로는 철학이나 유전이나 전통, 세속문화로 화려하게 위장하고 다가오는 영적 메트릭스 시스템, 눈에 보이지 않으나 존재하는 사탄(devil, satan)이 만들어내는 개인의 스토리다.
우리의 삶을 훔치고 도둑질하고 멸망으로 끌고 가는 기구한 운명의 스토리에서 빠져나오게 해 새로운 도전과 아름다운 부흥으로 우리들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분이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다.
성경은 말씀하신다.
“나, 너의 구원자는 용사같이 나가며, 전사같이 분발하여 외쳐 크게 소리쳐 너희 대적을 크게 치리라!”(이사야서)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 된 너희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 없으리라”(요한복음)
청춘들아, 겹겹이 다가오는 장애물들로 그대들의 스토리가 버겁거든 지금, 절대자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으로 불러보라. 그대들 청춘에게 새로운 인생 스토리가 시작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