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거인 알리바바 마윈②] ‘공동체정신’과 ‘의리’로 똘똘 뭉친 사나이
[아시아엔=안동일 동아시아 연구가] “부지런하면 밥은 먹고 살겠지만 큰 부자는 하늘이 낸다”는 말이 있다. 마윈을 보면 그 말이 맞는다. 그러면서도 필자는 문득문득 혼란에 빠지곤 한다. 그가 가진 부(富)의 실체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지금 필자 앞에는 알리바바의 영문판 홈페이지가 펼쳐져 있다.
오늘은 주황색 로고를 필두로 어페럴(의류) 판촉광고가 대문에 실려져 있다. 여느 인터넷 쇼핑몰 홈페이지보다 단순하고 차분한 느낌을 준다. 자매 사이트인 ‘타오바오’는 이보다 아기자기 하다. 쉽게 설명하면 알리바바는 도매(B2B), 타오바오는 소매(C2C)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이트들이 세계 최고의 증권시장에 의해 200억 달러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기업 가치를 단순한 시가총액으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시가총액은 중요한 지표다. 이 웹사이트가 200조원 이상의 가치가 있는 사이트란 말인가. 과연 그 만한 실체가 있단 말인가. 그러면서 다른 IT기업을 생각해 본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는 전 세계에 PC라 불리우는 개인 컴퓨터를 보급하게 한 수훈갑의 인물이다. 그는 MS DOS로 출발해 윈도우라는 획기적인 운영 시스템을 만들어낸 실적과 공훈이 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어떤가. 빼어난 상상력과 성실성으로 전문가들의 매켄토시 컴퓨터에서 출발해 스마트폰이라는 획기적인 제품을 생산 출시해 내지 않았는가. 구글과 페이스북은 누가 뭐래도 분명히 실체가 있다. 아마존은 엄청난 투자로 실제 도서며 생필품, 공산품들을 자신의 물류 창고에 쌓아두고 있다.
그런데 알리바바와 타오바오는 어떤가.
필자의 의구심은 여기서 출발 했다. 그리고 추적 끝에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마윈의 알리바바에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마윈과 그 동료들, 그리고 커스터머 혹은 유저라고도 불리고 멤버라고도 불리는 사람들 말이다.
알리바바와 타오바오는 중국 6억 인터넷 인구의 절반인 3억명의 중국인들이 매일같이 이용한다. 알리바바의 독특한 결제 시스템인 알리페이 구좌수가 진작에 3억을 훨씬 넘었다. 중국 젊은이들에게 알리페이는 은행보다 친근하고 믿음을 주고 있다. 요즘은 한국을 찾는 중국인 관광객들도 알리페이를 사용한다. 세제혜택까지 있다. 참고로 같은 온라인 결제 시스템인 ‘이베이’의 ‘페이팔’ 구좌수는 전세계를 다 합쳐도 1억3천만 남짓이다.
타오바오에는 무려 1800만개의 사이버 점포가 입점해 있다. 엄청난 숫자다. 光棍節(광군절, 중국 솔로의 날)이라 부르는 지난해 11월11일 총 거래액은 571억1200만 위안(한화 약 10조2077억원)으로 기존 거래액 기록까지 가볍게 갱신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마윈과 그의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 가장 무서운 것은 그가 지난해부터 공모하고 있는 투자펀드다. 마윈의 ‘위어바오’(餘額寶)펀드는 발매 9개월 만에 중국 전체 주식 투자자(약 7700만명)보다 많은 8100만명의 투자자를 끌어 모았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지난해 4월 보도한 바 있다. 그리고 1년이 지났으니 얼마나 늘었을지는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한 금융전문가는 “위어바오가 마음먹고 한 나라의 국채를 사들인다면 이는 그 나라의 경제 주권을 빼앗을 수 있다”고도 말한다. 마윈의 금융업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마윈은 어떻게 사람을 모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해서 마윈의 사람들은 그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는가. 일단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따져보기로 한다.
어린 시절
마윈은 1964년 9월 저장성의 성도 항저우에서 태어났다.
“하늘에는 천국이 있다면, 땅에는 쑤저우(?州)와 항저우(杭州)가 있다”(天上天堂,地下?杭)는 호반의 도시 항저우다.
마윈의 부모는 핑탄(評彈) 배우였다. 핑탄은 항저우 지방의 경극으로, 우리의 판소리와도 비슷하지만 좀 더 연극적인 면이 강하다. 마윈의 아버지는 항저우핑탄협회의 책임자였다. 그래서 마윈은 어린 시절부터 한 손에는 해바라기씨, 다른 한 손에는 떡 한 조각을 가지고 경극을 접하기 시작했다. 그의 쇼맨십이며 무대체질이 우연한 것이 아니다. 훗날 마윈은 자신의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어린 시절 듣던 경극의 영향이 크다고 고백했다.
마윈의 부모는 그가 조용하면서도 예술적인 감각이 있는 아이로 성장하길 기대했지만 그와 정반대로 고집 세고, 장난도 심하고, 타일러도 듣지 않는 개구장이로 성장했다. 경극 속에 울려퍼지는 부드러운 비파 소리도 그의 성격을 바꾸어 놓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마윈이 10살 되던 해 항저우에 축제가 열렸는데, 마윈은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빼먹고 축제에 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선생님에게 들켜 수포로 돌아갈 그때, 마윈은 가면을 쓰고 일어나 관운장 연기를 하며 선생님에게 보내줄 것을 졸랐다. 맹랑하지만 마윈의 당당함과 기개에 선생님도 넋을 잃고 봤다고 한다. 마윈은 공동체정신을 유난히 강조한다. 자신과 동료들 그리고 커스터머를 묶어 평등한 공동체(이퀄 커뮤니티)라는 말을 쓰고 있다. 지난 2013년 서울대 강연서에도 그는 이를 강조했다. 커스터머의 돈을 냉큼 가져오기보다는 그 돈을 불려 커미션을 받는 그런 경영방침과 닿는 맥락이다.
마윈 특유의 이 공동체적 철학은 유년시절 형성되기 시작했다. 마윈은 친구들의 문제 해결을 위해 두팔 걷어붙이고 나서는 해결사였다. 특히 그는 친구가 폭력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 참지 못했고, 평소에 잘 모르는 친구더라도 상급생들에게 구타당하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면 득달같이 달려가 상급생에게 대들곤 했다. 그 과정에서 뼈가 다 들어나 보이고 13바늘을 꿰매야하는 심한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렇지만 마윈은 “사나이는 쉽게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며 끝내 울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항저우에서 유명인사가 된 것도 이 공동체적 공공정신 때문이었다. 공영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시민들의 공공 정신을 파악하기 위한 몰래카메라 프로그램을 촬영하고 있을 때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