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쑨원·호치민’ vs ‘리콴유·요시다·등소평·박정희’···20세기 격동의 아시아 이끈 인물
정부가 사드와 AIIB 문제를 둘러싸고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면 구한말 고종이 생각난다. 그 문제의 결론은 처음부터 명확한 것이었다. 외교 책략으로서 시간을 끄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이것도 놓치고 저것도 놓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리콴유는 그 어려운 입지에서도 싱가포르를 얕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3월26일은 1875년 출생한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의 탄신 140주년이 되는 날이다. 리콴유가 요시다, 등소평, 박정희와 비견된다면, 우남은 한 세대 전 쑨원, 호치민과 비견되는 거목이다. 이승만은 이미 1920년대에 언젠가 태평양에서 일본이 미국과 다투게 된다는 것을 예견하였다. 6.25전쟁은 이승만과 김일성의 대결이 아니라, 이승만과 스탈린의 대결이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만큼 미국이 낮은 자세로 급하게 상대국의 요구를 들어준 조약이 없다.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요즘 사드와 AIIB 문제를 둘러싸고 좌고우면하는 박근혜 정부를 바라보며 한국이 구한말과 같은 상황에 봉착한 것이 아닌가 걱정하는 사람들을 보면 울화통이 터진다. OECD와 G20에 들어간 지 벌써 오래고 20-50에도 올라선 한국이 미·일·중·러 사이에서 허둥대는 것으로 비쳐지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구한말 우리의 국세는 지금과는 비교도 안됐다. 대원군과 민비는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군주 즉 고종이 문제였다. 고종의 통치력, 외교력은 한마디로 유야무야다. 고종이 친정을 시작한 1873년은 일본에서 명치유신이 이루어진 1868년에서 5년밖에 지나지 않는다. 국권을 사실상 상실한 을사늑약이 이루어진 1905년까지 30년 이상 조선과 대한제국의 군주로 있었던 고종은 나라를 망해먹은 가장 큰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일본의 강포함은 원래부터 압도적인 것이 아니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개시될 때 일군 수뇌부는 충청도 성환에서 첫 승리를 얻기 전까지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청군은 쉽게 무너졌고 평양성이 함락되는 즈음에 일본군은 자신을 가졌다. 승전에 고무된 국민들은 북경을 손에 넣고 성하지맹(城下之盟)을 맺으라고 다그쳤다. 그러나 일본의 실력을 냉정히 계산한 정부와 군부 지도자들의 판단은 달랐다. 거기에 더하여, 적당한 선에서 청·일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열강의 압력으로 일본은 대만과 요동반도를 얻고, 배상금 2억냥을 받는 선에서 청과 강화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주가 된 3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내어주게 되면서 러시아와 결판이 불가피하다는 결의를 다진 일본은 청일전쟁 배상금으로 10년간 러일전쟁을 준비했다. 영일동맹을 배경으로 러시아를 이겨낸 일본이었지만, 군비가 거의 파탄에 이르자 미국은 러시아를 끌어내어 포츠머스조약으로 전쟁을 끝내게 하였다. 이처럼 영국과 미국은 오늘의 일본이 있게끔 한, 인연이 깊은 나라이다. 미국이 G2중국을 길들이려는 대전략을 펴면서 아베의 일본은 다시 동양의 번견(番犬)을 자청하고 나섰다. 아베의 미국 상하양원 연설은 여기에 대한 보답이다.
3월26일은 1875년 출생한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의 탄신 140주년이 되는 날이다. 리콴유가 요시다, 등소평, 박정희와 비견된다면, 우남은 한 세대 전 쑨원, 호치민과 비견되는 거목이다. 이승만은 이미 1920년대에 언젠가 태평양에서 일본이 미국과 다투게 된다는 것을 예견하였다. 6.25전쟁은 이승만과 김일성의 대결이 아니라, 이승만과 스탈린의 대결이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만큼 미국이 낮은 자세로 급하게 상대국의 요구를 들어준 조약이 없다.
정부가 사드와 AIIB 문제를 둘러싸고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면 구한말 고종이 생각난다. 그 문제의 결론은 처음부터 명확한 것이었다. 외교 책략으로서 시간을 끄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이것도 놓치고 저것도 놓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리콴유는 그 어려운 입지에서도 싱가포르를 얕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이승만, 리콴유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었을까? 모든 것은 지도자에 달려있다. 지도자가 국력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