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 칼럼] ‘군수비리’를 보면서 임오군란이 떠오르는 까닭

임오군란 이후 조선의 왕권은 내외적으로 끝났다. 개화당에 의한 갑신정변은 청군의 출동으로 좌절되었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려는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과 일군에 의해 호남의 백성이 무수히(정확한 통계가 없으므로) 희생되었다. 이는 후일의 광주민주화운동에 의한 희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외국군이 수도에 주둔하면서 조선의 목을 누른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므로, 결과적으로는 고종이 자초한 것이었다. 1897년 대한제국의 선포,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은 일제에 대한 고종의 필사적인 저항이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조선이 망한 것에 고종이 최종 책임을 져야 되는 것은 이러한 경과다.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법적으로, 1910년에 대한제국은 일본에 병합되었다. 그러나 외교권을 상실하고 남산에 한국통감부(조선통감부가 아니다)가 설치된 1905년 조선은 사실상 망했다. 그에 앞서 왕비가 참살되고, 불살라진 1895년 을미사변에 조선은 종말을 고했다. 아니, 그보다 앞서 1882년 고종이 임오군란에 청군을 끌어들여 대원군이 청군에 압송되었을 때 조선은 사실상 끝난 것이다.

임오군란은 왜 일어났는가? 안동김씨의 세도에 어려움을 받다가 조대비와 합작하는 절묘한 공작으로 권력을 장악한 대원군은 척족을 경계하여 고단한 민가영을 왕비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대원군의 계산은 완전히 어긋났다. 영민한 왕비는 차차 고종에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그는 최익현의 상소를 유도, 활용하여 시아버지 대원군을 권력에서 밀어내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민씨 일가는 안동김씨의 척족세도를 재현하기에 이르렀다. 그 중심은 민겸호였다.

고종은 별기군을 창설하고 구식군대를 폐지하려 하였다. 그 결과 구식군대에 대한 대우가 나빠졌고, 급료를 지급하지 못한 지가 13개월이나 되었다. 모처럼 지급한 급료에 선혜청 고리(庫吏)들은 벼에다 겨를 섞었다. 격분한 군졸들은 고리와 싸웠는데, 선혜당상 민겸호는 그 주동자들을 잡아들였다. 더욱 격분한 군졸들이 민겸호를 습격하자 그는 궁궐로 피신하였다. 군졸들이 궁궐로 달려가 민겸호를 죽이고 왕비를 찾았으나, 왕비는 겨우 몸을 숨겨 탈출하였다. 고종은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군종을 배후에서 책동하고 있는 대원군을 입궐시켰다.

임오군란을 불지른 직접적 원인은 민씨 일가의 탐학이지만, 권력욕에 눈이 어두운 대원군도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다. 고종 18년, 그는 서장자 이재선을 국왕으로 추대하고 고종을 폐하려하였다. 그러나, 밀고로 인하여 일은 실패하고 이재선 이하 30여명이 처형되었다. 대원군이 이 사건의 장본인임은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국왕의 부친임으로 그만은 불문에 붙였다. 아무리 권력싸움에는 아비 자식도 없다지만, 자기가 올린 아들을 폐하고 다른 아들을 올리려 한 대원군의 행적은 오로지 권력욕뿐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다.

충주로 피신한 왕비는 고종과 연락이 닿았고, 고종은 김윤식을 시켜 청에 원병을 청하였다. 청은 오장경의 지휘로 3000명을 파견하였다. 오장경은 서울 요소에 청병을 배치한 후 군영으로 찾아온 대원군을 압송하여 천진으로 호송하였다. 대원군의 당부당(當不當)을 떠나서, 국내 정변을 타개하려고 외국군을 끌어들이고, 부친을 청군이 체포해가도록 한 고종의 행적은 천륜, 정치도의, 어느 모로도 용서할 수 없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의 왕권은 내외적으로 끝났다. 개화당에 의한 갑신정변은 청군의 출동으로 좌절되었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려는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과 일군에 의해 호남의 백성이 무수히(정확한 통계가 없으므로) 희생되었다. 이는 후일의 광주민주화운동에 의한 희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외국군이 수도에 주둔하면서 조선의 목을 누른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므로, 결과적으로는 고종이 자초한 것이었다. 1897년 대한제국의 선포,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은 일제에 대한 고종의 필사적인 저항이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조선이 망한 것에 고종이 최종 책임을 져야 되는 것은 이러한 경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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