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해인사 팔만대장경 구한 장지량 전 공군총장을 추모함

역사?안목이 인류문화유산 구하다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러시아 사회과학정보연구소 도서관에서 불이 나 고문서 200만점이 사라졌다. 그 가운데는 출간된 지 400년이 지난 유럽과 아시아 지역의 중세 슬라브어로 된 희귀문서 등 인류문화유산급 자료도 적지 않다고 한다. 연구소 소장은 이를 ‘러시아 문화계의 체르노빌 참사’로 빗대어 참담한 심경을 토로하였다.

여기서 해인사 8만대장경이 생각난다. 해인사는 승보사찰 송광사, 불보사찰 통도사와 함께 3보사찰의 하나인 법보사찰인데, 팔만대장경을 소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14세기 세계를 휩쓸던 몽고 침략을 받은 고려가 불법의 힘으로 침략을 물리치고자 만들어낸 불심의 정화(精華)요 결실(結實)이다. 유럽이나 중국, 인도의 대사원도 그렇지만 이들은 모두 신앙이 아니고서는 돈이나 권력으로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팔만대장경은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러한 민족문화의 보고요, 인류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이 일시에 사라질 뻔한 때가 있었다. 1951년 8월 유엔군은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을 벌이면서 당시 해인사로 숨어든 인민군을 폭격으로 제압하려고 계획하였다. 이때 이를 막은 것이 당시 1전투비행단 작전참모 장지량 장군이다. 그는 “어떠한 엄벌을 받더라도 1400년 된 문화재를 한 줌의 재로 만들 수 없다”며 미군측을 설득하면서 출격을 거부했다. 그의 결의에 감동을 받은 유엔군사령부의 결정으로 공습 계획이 취소돼 팔만대장경은 보존될 수 있었다.

전쟁 중 문화재 보존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참전국 간에 다를 수 있다. 2차대전 당시 영국군이 독일의 하노바를 폭격하지 않은 것은 현재의 영국 왕실이 하노바에서 왔기 때문이다. 만약 하노바가 미공군의 작전지역이었다면 그러한 자상한 배려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미군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고도, 경도(京都, 교토)는 폭격하지 않았다. 공군 수뇌부에 京都가 일본 역사와 문화에서 차지하는 가치를 아는 장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팔만대장경이 보존된 연유도 이와 같다. 장지량 장군은 호남 명문 광주 서중 출신으로 8만대장경의 민족사적 의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기에 그처럼 단호한 결심을 관철하였던 것이다.

장지량 장군은 1948년 육사 5기로 임관한 뒤 김정렬, 김신 장군 등과 함께 공군 창설 105인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로 육군 항공대가 공군으로 독립되자 초대 작전국장으로 F-51 무스탕 전투기 도입과 10개 비행장 확보 계획을 수립해 공군의 초석을 다졌다. 그 후 공군사관학교 교장을 거쳐 제9대 공군참모총장(1966~1968)으로 재직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에 건의하여 당시 최강의 전폭기 F-4팬텀기 도입 등 공군의 현대화를 주도하고 10개 전투비행단 기지를 확정하였다. 고속도로에 비상 활주로를 설치하는 것도 그의 아이디어다. 대공포에 맞은 전투기에서 비상탈출한 조종사들을 신속히 구조하기 위해 눈에 잘 띄는 빨간색 머플러를 착용할 것을 제안했던 것이다. 빨간 마후라는 이후 우리 공군의 대표적 상징이 됐다. 일본 육사 57기인 박정희 대통령은 조선인으로서는 드물게 육군 항공사관학교를 나온 장지량의 기량과 용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건의를 이해, 수용한 것이다.

삼가, 장지량 장군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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