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한중일 동북아시대의 ‘한미연합사’ 역할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한미연합사는 선구적 장군들의 총합이다. 한미동맹은 1954년 성립되었지만, 국군과 미군의 작전을 조정할 한미연합사는 1978년에야 창설되었다. 박정희 대통령도 연합사 창설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그것이 가능할지는 자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현역 시절 미 고문관과 별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작전권을 한미 양국이 연합으로 행사하는 초유의 실험에 미군이 과연 잘 응할지 확신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어려운 과제를 추진하여 1978년 한미연합사를 창설하는 대역사(大役事)를 이루어낸 것은 류병현 장군이다. 류병현 장군의 군정가로서의 공로는 6.25전쟁에서의 백선엽, 김홍일, 김종오 장군의 전공(戰功)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다. 한미연합사 체제는 한미 양국군을 2인3각 관계로 묶어놓은 것인데,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확고하게 증거하는 것이다. 단적으로 주일미군과 일본 자위대는 항상 한미연합사 체제를 매우 부러워하고 있다.

한미연합사가 창설되기 전 한국군을 작전지휘하는 유엔군사령부나 미 8군사령부에는 한국군 참모가 한 명도 없었고, 1971년 창설된 한미 1군단에 소수의 한국군 장교가 보직되어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한미 1군단에는 1.21이후 전방 철책공사를 이끌던 부군단장 이재전 장군을 비롯하여 그 후 국군의 수뇌부로 성장하게 되는 엘리트가 다수 포진하고 있었다. 이들이 연합사 창설의 주춧돌이 된다. 또한 한미연합사 창설에는 유엔군사령관 스틸웰 장군의 이해와 협조가 결정적이었다. 스틸웰 장군은 1976년 북한군의 도끼만행 사건이 일어났을 때 단호한 보복 위협으로 6.25전쟁 이래 최초로 김일성의 사과를 받아낸 맹장이었다.

연합사를 창설해 나가는 초기단계에서 미군도 연합사의 기능과 위상을 정확하게 잡지 못하고 있었다. 최초 미군이 연합사 부사령관의 집무실을 유엔군 사령관 옆방의 주임상사 방으로 잡았던 것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가운데서 연합사가 한미연합군 군령최고사령부라는 위상을 확립한 것은 류병현 장군 노력이 컸다. 영어와 한국어가 같이 공용어가 된 것도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윗선의 대통령이나 국방부장관이 이러한 대역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시시콜콜 알지 못한다. 그저 결과가 좋으면 수고했군,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군이나 정부기관이나 기업에서 실무를 담당한 사람의 고충은 실제로 해본 사람만이 안다. 지도자는 이러한 과정을 거친 사람이 올라가야 한다.

월남전이 확대되어 채명신 맹호사단장이 주월사령관으로 올라가자 류병현 장군이 뒤를 이어 맹호사단장이 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과 채명신 사령관의 류병현 장군에 대한 신뢰가 두터웠음을 보여준다. 주월한국군은 채명신 장군의 일관된 논리와 노력으로 최초부터 독자적 작전권을 행사하였다. 맹호사단장으로서 류병현 장군은 미군과 협조관계를 잘 유지하였고 이러한 경험도 한국군과 미군이 초유의 연합사를 이루어나가는 데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1968년 1.21사태로부터 경계·방위태세의 전반적 쇄신, 1974년 율곡계획의 시작, 다시 1978년 한미연합사 창설로 박정희의 자주국방은 탄탄한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라는 미증유의 참사를 당해서도 국군이 흔들리지 않고 대북 억제태세를 유지하였던 것은 한미연합사가 확고하게 기능하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박정희의 자주국방은 한미연합사 창설로 대미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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