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1968년 1·21사태는 자립경제·자주국방의 ‘갈림길’
1968년 1월 21일 일단의 북한군이 ‘박정희의 목을 따기 위해’ 청와대를 습격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피격 직전에 저지되었지만 잔당을 쫒기 위한 수색작전은 이후 한 달 동안 계속되었다. 북한은 같은 시기 원산 앞바다에 있던 미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납치하였다. 미군이 월남전에 묶여 있는 것을 노린 김일성의 대담한 공격이었다. 키신저의 회고록에 의하면 당시 미군이 보복에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을 점검해보니 불충분하여 협상에 응했다고 한다. 천하의 미 해군도 전력운용을 잘못하여 함선이 백주에 납치당하는 망신을 당한 것이다. 이와는 달리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에는 적절한 전력 동원으로 북한을 압박, 결국 사상 초유로 김일성의 사과를 받아내었다.
한국의 자주국방은 이때를 기점으로 완벽하게 갈린다. 비유를 하자면, 인류문명이 스티브 잡스 이전과 이후로 갈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전방의 방위태세를 가리켜 흔히들 철통같은 방위태세라는 말을 쓰지만, 1.21 이전에는 휴전선은 1953년 휴전협정이 맺어질 당시 그대로 목책에 철조망이 둘러져 있는 것에 불과하였고 남북 군인들은 서로를 넘어 다녔다. 그러나 1.21사태 이후 군은 이를 문자 그대로 철통으로 만들었다.
한신 야전군사령관 지휘 하에 작전참모 이재전 장군 등 막료들은 갖은 방법으로 애로를 극복,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었다. 철책선은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보완되어 왔지만 골격은 그대로다. 철책선의 강화와 함께 경계태세도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전방철책선이 뚫리면 사단장이 날아갔다. 후방에서 잡히면 간첩의 이동경로를 추적하여 해당지역의 사단장도 날아갔다. 남북화해 협력을 추진하는 동안에도 군의 대비태세는 한 치의 빈틈이 있어서는 안 된다.
1.21 이전에는 국방비도 대부분 미국이 지원하였다. 미국이 PL480에 의해 원조한 밀을 팔아서 얻은 돈을 대충자금(對充資金)이라고 하는데 국방비도 여기에 의존하였다. 5.16 후에도 군원이 우리 군에 결정적인 상황은 지속되었다. 한국 정부는 봉급과 주식 부식 등 최소한만 감당하였고 유류 등 대부분의 운영유지는 미 군원에 의존하였다. 전력증강비란 거의 없었다. 우리 경제력이 향상됨에 따라 군원 의존은 차차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방비가 전액 예산으로 충당된 것은 1990년 들어와서다. 우리를 산업화에 성공한 나라라고 하지만 이를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자주국방의 진전이다.
한일국교 정상화에 따른 청구권 자금과 월남파병에 따른 특수로 걸음마를 시작하던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이 병행하는 방향으로 대전환을 하게 된다. 1974년부터 전력증강계획, 일명 율곡계획이 시작되었다. 율곡사업은 합참본부장 이병형 장군이 필두가 되어 작성하였는데 당시 한국군이 가진 전 역량을 집중한 것이었다. 율곡사업은 대통령이 직접 통제하였다. 율곡사업은 감사원이 감사를 하지 않고 대통령 직속의 특명검열단이 통제하였다. 문민정부 초기에 이회창의 감사원이 율곡계획을 들여다보았는데 기대(?)하였던 비리는 별로 밝혀내지 못했다. 율곡사업은 박정희 이래 통수권자들이 친히 운영되어 왔으며 율곡 담당부서도 나름대로 자정작용을 해왔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1968년 1월21일은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을 같이 이루게 되는 우리 현대사의 갈림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