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사람

‘신군부 마지막 핵심 인물’ 정호용 별세…민병돈 “지휘책임 없어” vs 5·18단체 “책임 끝나지 않아”

수원 아주대병원 정호용 장관 빈소

대법원은 내란목적살인 등 징역 7년 확정…5·18 단체 “사죄 없이 떠나”
민병돈 전 육사교장 “배속 순간 원 소속 지휘관 작전지휘권 없어”

12·12 군사반란과 5·18민주화운동 진압 과정에 관여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정호용 전 국방부 장관이 12일 별세했다. 향년 94세.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이희성 전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황영시 전 육군참모차장과 함께 신군부 핵심 인물로 꼽힌 5명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였다.

당초 사망일이 13일로 알려졌으나 유족 등을 통해 12일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조용히 치러졌으며 14일 새벽 발인과 화장을 마쳤다.

1932년 대구에서 태어난 정호용은 전두환·노태우와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였다. 1979년 12·12 당시 육군 제50사단장이었으며 이후 특전사령관에 임명됐다. 1980년 5·18 당시 특전사 예하 제3·7·11공수특전여단이 광주에 투입됐다.

정호용은 생전 줄곧 자신에게 광주 진압작전 지휘권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공수여단들이 현지 지휘관에게 작전배속됐기 때문에 특전사령관인 자신은 작전을 직접 지휘하지 않았다는 논리였다.

민병돈 전 특전사령관·육군사관학교장도 정호용의 이 같은 주장을 군 지휘체계상 타당하다고 평가했다. 민 전 사령관은 14일 아시아엔과의 통화에서 “광주에 투입된 특전사 3개 여단은 교육사령관에게 배속됐고 다시 31사단장에게 배속됐다”며 “배속은 지휘권 자체를 넘겨주는 것이기 때문에 원 소속 지휘관인 특전사령관에게는 작전지휘권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군에서는 지휘계통을 둘로 만드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며 “배속된 부대에 원 소속 지휘관이 다시 작전명령을 내리면 지휘계통이 이중화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민 전 사령관은 자신의 군 경력을 들어 이 문제를 거듭 강조했다. 그는 “나는 대령 때 육군대학 지휘학처장을 지냈고 이후 여러 지휘관을 했다”며 “초등군사반, 고등군사반, 육군대학에서 지휘관계와 지휘통제를 반드시 가르친다. 직업군인이라면 배속의 의미를 모를 수 없다”고 말했다.

민병돈 전 사령관은 “내 경험과 군 관련 지식으로 볼 때 정호용 장군에게 광주 작전의 직접적인 지휘책임을 묻는 것은 군 지휘원칙과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정호용이 5·18 기간 광주를 방문한 사실에 대해서도 민 전 사령관은 작전지휘보다 특전부대의 군수지원 문제와 관련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그는 “당시 일반 보병부대와 특전부대는 장비와 보급체계가 달랐다”고 말했다. “일반 부대에는 당시 M16 소총이 충분하지 않았지만 특전부대는 M16을 사용했고 탄약도 달랐다. 전투식량과 야전 군수지원 체계도 일반 부대와 달랐다.” 민 전 사령관은 이어 “현지에 배속된 여단들이 작전지휘는 현지 지휘관에게 받더라도 특전사 고유 장비나 탄약 같은 문제는 원 소속 사령부가 살펴야 할 수 있다”며 “정호용 장군이 광주에 내려간 것은 그런 보급과 군수지원 필요성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고 말했다.

민 전 사령관은 이 같은 해석이 정호용에게 직접 전해 들은 내용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정호용 장군한테 들은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군 지휘원칙과 당시 상황을 놓고 판단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정호용에게 5·18 책임이 부과된 데에는 정치적 요인이 작용했다고 주장했다. “전두환, 노태우에 이어 육사 11기 가운데 정치적으로 정호용이 부각될 가능성을 경계한 세력이 5·18 문제를 이용해 그를 공격했다고 나는 본다”는 것이다.

이는 민병돈 전 사령관 개인의 평가다. 사법부의 판단은 달랐다.

80년 5.18 당시 광주를 방문한 정호용 특전사령관(오른쪽)

대법원은 1997년 정호용에게 반란중요임무종사와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등의 책임을 인정해 징역 7년을 확정했다. 특히 1980년 5월 27일 시민군이 남아 있던 전남도청에 계엄군이 재진입한 작전과 관련해 정호용의 책임을 인정했다.

이후 조사에서도 정호용이 5·18 기간 네 차례 광주를 찾아 모두 약 81시간 머문 사실과 공수여단 지휘관들이 참석한 회의 등에 관여한 정황이 확인됐다.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역시 정호용을 광주 진압 과정의 책임선상에서 제외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한편 민 전 사령관은 정호용 개인 성향 등과 관련해 “전두환·노태우·정호용 세 육사 동기 가운데 공부를 가장 많이 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박사학위까지 받았고 영어도 꽤 잘했다. 전두환, 노태우 두 사람은 영어에 능숙한 편이 아니었지만 정호용은 미군부대 근무 경험도 있었고 영어도 곧잘 했다. 세 사람 가운데 지식인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민 전 사령관은 자신과 정호용의 관계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내가 사단장을 할 당시 정호용 장군은 3군사령관이었고, 이후 그가 육군참모총장을 할 때 나는 일반참모부장과 특전사령관을 했다”며 “부하에게 까다롭게 간섭하거나 사소한 문제까지 일일이 개입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오래전이라고 했다. 민 전 사령관은 “정호용 장군이 말년에 건강이 좋지 않아 입원하기도 하고 집에서 요양하기도 했다”며 “마지막으로 직접 만난 것은 몇십 년 전”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 전 장관의 별세 소식도 “신문을 보고 알았다”고 했다.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장관 임명장을 받고 있는 정호용(오른쪽)

정호용은 5·18 이후 제3야전군사령관을 거쳐 1983년 육군참모총장에 올랐고 1985년 대장으로 예편했다. 이후 내무부 장관과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1988년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나 5공 청산 과정에서 의원직을 사퇴했고,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다시 당선됐다.

그는 1997년 징역 7년형이 확정된 뒤 같은 해 12월 특별사면됐다. 이후에도 자신의 5·18 지휘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5·18 관련 단체들은 정호용이 끝내 사과나 진상 고백을 하지 않고 세상을 떠난 데 대해 유감을 나타냈다. 이들은 최초 발포와 집단발포 경위, 최종 명령권자 등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에 대한 진상규명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정호용의 죽음으로 신군부 핵심 인물로 분류된 5명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대법원의 확정판결과 5·18 진상조사 결과는 정호용의 책임을 인정하고 있다. 반면 민병돈 전 사령관은 군의 ‘작전배속’ 원칙을 근거로 정호용에게 직접적인 작전지휘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정호용이 광주에서 실제 어떤 보고를 받고 무엇을 지시했는지, 작전배속 이후 특전사령관의 권한과 역할이 어디까지였는지는 앞으로도 관련 군 문서와 당시 지휘관들의 기록을 통해 따져볼 대목으로 남았다.

생전의 정호용 전 장관
▼ 아시아엔 후원계좌 ▼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후원은 아시아엔과 아시아 저널리즘의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됩니다.
우리은행 1005-601-878699 (주식회사 아자미디어앤컬처)

이상기

아시아엔 기자, 전 한국기자협회 회장

필자의 다른 기사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본 광고는 Google 애드센스 광고이며, 본 사이트와는 무관합니다.
Back to top button
AI 에이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