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오래전에 본 영화 《최종병기 활》의 한 대사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이 말은 어느새 나의 삶을 이끄는 문장이 되었고, 내가 살아오며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는 말이 되었다.우리의 삶에도 계산만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바람이 수없이 불어온다. 갑작스러운 사고와 질병, 부모의 실직이나 소득 감소처럼 크고 작은 사건들이 한 가정의 평범한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기도 한다. 물론 경제생활에는 계획과 계산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해도 모든 위험을 피할 수는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예상하지 못한 위기가 찾아왔을 때, 이번 경제·리더십 캠프는 고려인 청소년들이 삶의 ‘바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스스로 방향을 정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기르는 과정이 되길 기대하며 준비했다.

아침부터 모두가 분주했다. 오늘은 팀별로 카누를 타고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날이었다. 삼척 장호항의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하는 조현수 목사님의 손길도 바빴다. 아이들에게 충분히 안전교육을 했지만, 그래도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뜨거운 여름날, 아이들이 좋아하는 물놀이이기는 하지만 단순한 물놀이로만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아이들이 바다를 향해 힘차게 노를 저으며, 자신의 가슴에 품은 꿈을 향해서도 그렇게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나 역시 마음이 설렜다. 그러는 사이 삼척 장호항에 도착하자 에메랄드빛 바다가 우리를 맞아 주었다. 바다는 잔잔했지만, 아이들의 가슴은 파도처럼 뛰고 있었다. 장호항은 지중해의 어느 아름다운 해안을 떠올리게 해 ‘한국의 나폴리’라고 불리는 곳이다. 파도가 완만하고 수심의 변화도 크지 않아 아이들이 해양 체험을 하기에도 부담이 적었다.
구명조끼를 입은 아이들의 모습은 제법 당차고 의젓했다. 이순신 장군의 후예인 우리가 바다를 두려워하겠느냐마는, 그동안 바다를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고려인 아이들이 주저하지 않고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한마디로 멋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이들의 꿈도 저 바다처럼 넓어지고, 힘찬 노 젓기처럼 앞으로 뻗어 나가기를 바랐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어느새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마지막 날 저녁이기에 나는 바비큐장에서 아이들에게 고기를 마음껏 먹이고 싶었다. 그러나 이번 리더십 캠프는 경제교육과 연결되어 있었기에 아이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에도 절제가 필요했다.
캠프 기간 아이들은 생활에 필요한 기본 경비를 지출했고, 성경 구절을 암송하며 얻은 수입으로 자신들이 먹을 고기값도 직접 지불해야 했다. 돈이 부족한 팀은 비교적 여유가 있는 팀에게 빌릴 수 있도록 했고, 다른 팀을 도와준 경우에는 ‘나눔 포인트’를 받을 수 있게 했다. 아이들은 돈을 벌고, 쓰고, 빌리고, 나누는 과정을 통해 경제생활의 기본 원리를 자연스럽게 경험했다.

숯불의 열기가 여름밤의 온도만큼 뜨겁게 올라왔다. 고기가 익어 가는 냄새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바비큐장을 가득 채웠고, 그렇게 캠프의 마지막 결산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바비큐 준비를 조현수 목사님과 오필준 부장선생님에게 맡기고, 객실에 홀로 들어가 그날 저녁의 마지막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평소 아이들과 잘 어울리고 아이들도 무척 좋아하는 조 목사님이 함께하고 있어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캠프를 진행할 때마다 함께 동역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아이들이 더 세심한 돌봄을 받고, 프로그램의 결과도 더욱 풍성해진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매번 캠프가 끝날 때면 더 많은 동역자와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이 마음 한편에 남는다.
저녁을 배불리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우리는 리더십 캠프의 마지막 결산을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아이들의 얼굴은 기대감으로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캠프 기간 자신들에게 남은 돈을 실제 현금으로 바꾸어 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아마도 사고 싶은 것과 갖고 싶은 것을 저마다 마음속에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언제나 계획하고 기대한 대로만 흘러가던가.
나는 빈 상자 안에 예측하기 어려운 열여섯 가지 ‘삶의 바람’을 적어 넣었다. 갑작스러운 경비 지출을 의미하는 종이들이었다. 그것은 우리 삶에 예고 없이 불어오는 거센 바람과도 같은 것이었다.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르는 아이들은 자신들이 모은 수입을 자신 있게 이야기하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아이들이 모은 돈은 대략 10만 원에서 20만 원 정도였다. 그러나 상자에서 한 장씩 뽑은 종이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지출이 적혀 있었다.

‘엄마 병원비 30만 원.’ ‘월세 30만 원.’ ‘자녀 옷값 15만 원.’ ‘휴대전화 수리비 10만 원.’
‘자동차 사고 처리비 30만 원.’ ‘갑작스러운 실직으로 인한 생활비 30만 원.’ ‘자녀 등록금 20만 원.’
자신이 부모가 되었을 때 책임져야 할 비용부터 부모를 대신하여 감당해야 할 지출까지, 아이들이 어렵게 모은 수입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의 잔인한 계획이었다. 모든 아이는 가진 돈으로도 부족해 빚을 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장면과도 같았다. 아이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어이없다는 표정도 있었고, 실망과 좌절의 표정도 보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이들은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의 한 장면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 순간 다시 영화의 대사가 떠올랐다.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이 한마디는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내가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 자리까지 오게 한 힘이기도 했다. 나는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의 고려인 청소년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살아가다 보면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거센 바람이 불어온다. 중요한 것은 바람이 불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바람 앞에서 어떻게 판단하고 서로 도우며 다시 일어설 것인가이다.
물론 나는 캠프가 끝나면 참가한 모든 아이에게 장학금을 줄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만큼은 아이들이 좌절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느껴 보기를 바랐다. 그리고 좌절이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고 극복하는 출발점이라는 사실도 깨닫기를 원했다.
리더는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좌절할 수도 있고, 잠시 주저앉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일어서는 것이 힘이며, 그 힘으로 한 발을 내딛는 사람이 진정한 리더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바로 그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출발선이 다른 고려인 청소년들에게는 어쩌면 다른 사람보다 한 걸음을 더 내디뎌야 하는 노력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출발선이 다르다고 해서 꿈의 크기까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바람이 거세다고 해서 목적지마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결코 자신의 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손길과 사랑이 필요하고, 서로를 향한 신뢰와 협력이 필요하며, 무엇보다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나는 아이들에게 인생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아이들이 삶의 성장통을 견디며 한 사람의 리더로 자라나는 모습을 통해 내가 다시 인생을 배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다를 향해 힘차게 노를 저었던 아이들처럼, 삶의 거센 바람 앞에서도 자신의 꿈을 향해 멈추지 않고 나아가기를 바란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혼자 감당하기 어려울 때는 서로의 손을 붙잡으며, 자신에게 불어오는 바람을 새로운 방향과 힘으로 바꾸어 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러한 비전을 품은 채 경제·리더십 캠프의 마지막 밤은 깊어 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