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육

[소학섭의 고려인청소년㉗]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의 특별한 기말시험

필자 소학섭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 교장은 “작은 무대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아이들이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당당히 걸어가기를 바란다”는 말을 달고 다닌다. 그의 꿈이자 다짐이다.

작은 캠퍼스 곳곳에서 아이들이 서성거린다. 한 손에는 휴대전화를 들고, 입으로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린다.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안 되는 비밀을 간직한 사람처럼 조심스럽고 긴장된 표정이다. 이것은 매 학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앞둔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의 익숙한 풍경이다. 기말고사는 한 학기 동안 선생님과 함께 공부한 내용을 정리하고,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확인하는 시간이다. 방학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요즘, 학교는 기말고사 준비로 어느 때보다 분주하다.

우리 학교 아이들의 한국 생활은 대부분 자신의 선택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부모가 먼저 한국으로 이주한 뒤, 아이들은 짧게는 3년, 길게는 10년 동안 본국에 남아 조부모나 친척들과 생활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아이들의 눈앞에는 처음부터 커다란 벽이 놓인다. 낯선 언어, 낯선 문화, 낯선 학교생활. 아이들은 그 벽을 바라보며 희망보다 한숨을 먼저 배운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다르다. 오늘은 아이들이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들어 자신이 배운 한국어를 마음껏 뽐내는 기말고사 날이다. 전교생이 다목적홀에 모였다. 발표하는 친구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이 매우 진지하다. 친구의 발음과 표정, 손동작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는다. 마치 자신들이 심사위원이라도 된 것처럼 집중해서 발표를 지켜본다. 그리고 옆 친구와 함께 채점을 하는지 귓속말을 속삭이기도 하고, 서툰 발음 때문인가? 아니면 어설픈 연기 때문인가? 조용히 초침 소리만 들리는 지필고사 교실 분위기는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엔 없다. 웃기도 하고 박수도 치고 콘서트를 보는 것 같은 날이다. 그 앞에는 일곱 명의 선생님이 앉아 있다. 평소에는 누구보다 따뜻하게 아이들을 격려해 주는 선생님들이지만, 이날만큼은 냉정하고 공정한 평가자가 된다.

반별로 기말고사의 내용도 다양하다. 이것은 내가 학교에서 계속 강조해 온 ‘의사소통 능력’을 키우기 위한 교육의 한 과정이다. 단순히 문법 문제를 풀고 단어를 암기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배운 한국어로 생각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훈민다반 학생들의 이번 발표 주제는 ‘한국의 긍지’였다. 아이들의 국적과 태어난 곳은 서로 다르지만, 아이들은 이미 한국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한국을 단순히 머무는 나라가 아니라 자신들의 미래를 만들어 갈 나라로 받아들이며 ‘한국의 긍지’에 대해 발표했다. 발표 제목만 들어도 제법 당차고 힘이 있었다. 한강의 기적, 광복절, 한글날, 방탄소년단, 블랙핑크 등 아이들은 자신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직접 선택했다.

로뎀나무 학생들이 에브게니, 다닐, 이리나, 스베타, 발레리아(왼쪽부터)와 함께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그런데 한 학생이 갑자기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달라고 말했다. 잠시 후 애국가 전주가 흘러나왔다. 그 학생은 발표를 듣고 있던 모든 사람에게 함께 애국가를 부르자고 제안했다. 아이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뜨거운 마음으로 대한민국을 노래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 한편에서 깊은 감동이 밀려왔다. 한국어 상급반 학생들의 생각은 역시 남달랐다. 아이들은 한국어를 잘 말하는 것을 넘어, 이제 자신이 대한민국이라는 마음을 한국어로 표현하고 있었다.

한국어를 배우는 아이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는 감정을 세밀하게 표현하는 일이다. 평소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기분이 어때?”라고 물으면 대답은 대부분 두 가지로 나뉜다. “좋아요.” “안 좋아요.”

한국어에는 기쁨, 설렘, 두려움, 서운함, 외로움, 안도감, 뿌듯함처럼 수많은 감정 표현이 있지만, 우리 아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정확한 말로 표현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훈민나반의 이번 과제는 자신이 선택한 감정 어휘를 중심으로, 그동안 배운 문법을 활용해 현재 자신의 감정을 발표하는 것이었다. 엘리나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선택했다.

그는 한국으로 이주하기 전, 자신이 원하지 않았음에도 한국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파도처럼 밀려오는 두려움을 표현했다. 엘리나는 늘 웃는 아이다. 언제나 밝고 씩씩해 보였기에 그의 마음속에 그런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발표를 듣는 동안 비로소 엘리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두려움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 미안했다. 아이의 웃음만 보고 그 마음까지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막심은 ‘기쁨’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막심은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우며 조금씩 자신감을 얻어 가고 있는 것이 기쁘다고 말했다. 또한 앞으로 자신의 꿈을 펼쳐 갈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기쁘다고 했다.

엘리나 학생이 ‘두려움’을 소재로 소감을 발표하고 있다.

아이들은 발표를 통해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마음을 하나씩 꺼내 놓았다. 두려움, 기쁨, 외로움, 설렘, 걱정, 감사…. 아이들이 들려주는 수많은 감정을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마음을 시험 문제로 만날 수 있는 기말고사가 또 어디에 있을까.’ 이런 기말고사를 치르는 학교는 아마 우리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자부심이 생겼다.

초급반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께는 늘 미안한 마음이 있다. 한국어의 기초가 거의 없는 아이들을 데리고 수업을 이끌어 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초급반 기말고사는 두 명씩 짝을 지어 자신의 고향을 소개하는 관광 안내 역할극이었다. 한 명은 관광 가이드가 되고, 다른 한 명은 여행객이 되어 자신이 태어난 나라의 아름다움과 문화를 소개하는 방식이었다.

그중 안드레이는 우크라이나에서 왔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지금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전쟁의 공포와 두려움이 깊은 상처로 남아 있어서인지, 안드레이는 자신의 고향인 우크라이나를 소개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대신 대한민국을 소개하고 싶다고 말했다. 안드레이가 선택한 발표 내용은 서울의 아름다운 야경, 롯데월드타워, 한강, 그리고 떡볶이였다. 어쩌면 그는 전쟁의 상처가 남아 있는 고향 대신, 지금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평화로운 일상과 새로운 희망을 소개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모두 직접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들어야 한다. 슬라이드를 보여 주면서 동시에 한국어로 발표해야 한다. 한국어가 모국어인 학생들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사진을 고르고, 글씨를 넣고, 때로는 재미있는 그림과 재치 있는 표현을 활용하며 자신만의 발표 자료를 완성한다.

아이들의 정성이 담긴 프레젠테이션을 구경하는 것 역시 기말고사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고려인 청소년들은 본국에서 누구보다 큰 꿈을 꾸며 자랐다. 그러나 부모를 따라 한국이라는 할아버지의 나라에 온 순간, 그동안 쌓아 온 많은 것을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익숙한 언어도, 친구도, 학교도 없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일은 하나의 거대한 모험이며 도전이다. 거기에는 때로는 벽에 부딪히고, 좌절하고, 자신의 꿈을 포기하는 청소년들도 있다. 한국에 왔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방황하는 아이들도 있다.

교직생활 43년 국어 과목을 가르친 서소현 선생님의 총평을 학생들이 경청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소망한다.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가 아이들에게 단순히 한국어를 가르치는 학교를 넘어, 다시 꿈을 꾸게 하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고, 느리더라도 끝까지 걸어갈 수 있으며, 누구도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 꿈터가 되기를 바란다. 오늘 아이들이 발표한 한 문장, 서툰 발음 하나, 떨리는 손끝 하나에는 지난 한 학기 동안의 수많은 노력과 눈물이 담겨 있다.

기말고사는 아이들의 실력을 평가하는 날이지만, 나에게는 아이들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날이다. 고개를 숙이고 학교에 들어왔던 아이들이 어느새 사람들 앞에 서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한국어로 말하고 있다.

오늘의 발표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이들은 이미 어제보다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의 작은 무대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아이들이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당당히 걸어가기를 바라며, 나는 또다시 내일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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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섭

(사)청소년미래연구 이사장,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 이사장 겸 교장, 다문화전문가 2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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