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낯선 환경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 더 깊고 아픈 어려움은 자신을 바라보는 낯선 시선 속에서도 스스로를 잃지 않는 일이다. 때로 그 시선은 말보다 날카롭고, 때로 그 침묵은 아이들의 마음을 더 깊이 흔든다.
날개가 꺾인 새에게 갑작스러운 소낙비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작은 나무의 잎사귀 하나도 비를 피할 수 있는 품이 될 수 있다.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는 바로 그런 곳이고자 한다. 거창한 이름보다 먼저, 비를 맞는 아이들에게 잠시라도 숨을 고를 수 있는 그늘이 되고자 하는 곳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가장 힘든 질문은 어쩌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일지 모른다. 정체성이 분명한 아이들은 자신의 미래를 향해 걸어갈 힘을 얻는다. 그러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앞으로 걷는 일조차 버거운 일이 된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늘 말해 왔다. “너희의 뿌리는 대한민국이다. 너희는 대한민국의 역사였고, 대한민국의 미래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의 의미가 아이들에게는 아직 실감 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오늘은 그 말이 아이들의 가슴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날이었다.

어제부터 오필준 부장선생님은 유난히 분주했다. 마음이 들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열성 팬이다. 주말이면 축구 응원 인파 속에서 자신의 함성이 한몫한다고 자부심을 갖는 분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월드컵 첫 경기인 체코전이 열리는 날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단체 관람을 하고 싶은 마음이 그의 표정에 그대로 묻어났다.
나는 그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월드컵 경기가 시작되는 시간에 아이들이 함께 방송을 볼 수 있도록 허락했다. 오 부장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오라고 안내한 듯했다. 학교 안에는 작은 설렘이 흐르고 있었다.
마침내 월드컵 첫 경기가 열리는 아침이 밝았다. 그날 오전에는 주차장에 있던 창고를 옮겨야 했다. 멘토링 선생님들과 함께 이른 시간부터 창고를 옮기느라 마음이 바빴다. 그러나 그 바쁨 속에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잠시 후 월드컵 첫 경기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술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은 하나둘 다목적 홀로 모였다. 벌써 얼굴에는 태극기가 그려지고 있었다. 친구의 볼에 조심스럽게 태극 문양을 그리고,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서로의 얼굴을 꾸며 주는 손길이 바쁘게 움직였다. 누가 보아도 그 아이들은 대한민국의 미래였다.
누구보다 대한민국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 아이들. 누군가에게는 처음부터 주어진 당연한 권리일 수 있지만, 이 아이들에게는 아직도 멀고 낯선 꿈처럼 느껴지는 현실이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아무도 그런 무거운 생각에 머물지 않았다. 아이들의 마음에는 오직 대한민국이 이기기를 바라는 간절한 응원만이 가득했다.
아이들이 자리에 앉자 오 부장선생님은 단체 응원을 시작하려 했다. 그런데 뜻밖의 장면이 펼쳐졌다. 아이들이 서로의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단체 응원을 해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었던 것이다. “오 마이 갓!” 둥둥, 둥둥둥.
북소리에 맞춰 “대~한민국!”을 외치는 응원을 가르쳐 주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너무도 신기하다는 듯 웃었다. 박수를 어떻게 치는지 알려 주고, 응원 영상을 보여 주었다. 그제야 아이들은 조금씩 리듬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어색했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마침내 다목적 홀 안에는 “대~한민국!”이라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북을 치는 선생님도, 응원하는 아이들도 모두 신이 났다. 월드컵은 아이들에게 잠시나마 자신의 뿌리를 보게 했다. 그리고 그 뿌리 속에서 대한민국을 보게 했다.
그러던 중 체코가 먼저 골을 넣었다. 순간 아이들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번졌다. 아이들과 함께 앉아 있던 이리나는 풀이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아이들에게 더 큰 소리로 응원하자고 다독였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고, 더 크게 대한민국을 외쳐 보자고 말했다. 가라앉은 분위기는 쉽게 살아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얼마 후 대한민국이 동점골을 터뜨렸다. 아이들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웃음이 터졌고, 환호가 터졌다. 나도 기뻤고, 우리 모두가 기뻤다.
그것은 단순한 축구 경기가 아니었다. 그 순간 아이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어디에 연결되어 있는지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민국의 역전골이 나왔다. 아이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대한민국!”을 외쳤다. 이리나의 눈가에는 눈물이 글썽였다. 그 눈물은 단지 골이 들어가서 흘린 눈물이 아니었다. 월드컵의 함성 속에서 한 고려인 청소년이 자신도 대한민국과 연결되어 있음을 다시 느끼는 순간이었다.
모든 고려인 청소년이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의 아이들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회복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처음 학교에 입학하는 많은 아이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 어떤 역사를 가진 사람인지, 앞으로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지 쉽게 알지 못한다.
그래서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는 아이들에게 다시 역사를 보게 한다. 과거를 기억하게 하고, 현재의 자신을 이해하게 하며, 미래를 향해 걸어갈 힘을 심어 주고자 한다. 과거와 현재를 정확하게 알고 깨달을 때 비로소 미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고려인학교가 필요한 이유이다. 이것이 우리가 민족사관학교로서 더욱 튼튼한 기초를 세워 가고 싶은 이유이다.
이제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의 아이들은 자신이 대한민국과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고 믿는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역사와 이어져 있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향해 걸어갈 사람들이다.
지금은 한국 사회 속에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낯선 시선을 견뎌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선이 아이들의 정체성을 꺾을 수는 없다. 오히려 아이들은 그 시선을 넘어 더 단단해질 것이다.
아직도 그날의 뜨거운 함성이 귓가에 남아 있다. 뿌리가 같은 고려인 청소년들에게 월드컵은 단순한 스포츠 경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대한민국의 역사와 미래의 일부임을 확인하는 또 하나의 고백이었다.
그리고 그 함성은 마치 동토의 땅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선조들의 뜨거운 외침처럼, 아이들의 가슴 깊은 곳에 오래도록 메아리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