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 자의 귀환을 말하기 위해 저승까지 내려갔던 두 영웅에게, 죽은 자들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오디세우스가 저승에서 처음 만난 사람 가운데에는 엘페노르가 있었다. 그는 영웅도, 왕도 아니었다. 키르케의 섬에서 술에 취해 지붕에서 떨어져 죽은 젊은 선원이었다. 문제는 그가 죽었다는 것이 아니었다. 제대로 묻히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엘페노르는 오디세우스에게 부탁한다. 자신을 잊지 말고 돌아가 장례를 치러달라고.
살아 있는 오디세우스에게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 가장 중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승에 내려온 순간, 그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다. 죽은 사람 하나를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일이었다.
아이네이아스도 저승에서 비슷한 사람을 만난다. 팔리누루스. 그는 아이네이아스의 배를 이끌던 조타수였다. 항해 중 바다에 빠져 죽었지만 그의 몸은 땅에 묻히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저승의 강을 건너지 못하고 강가에 머물러 있다. 아이네이아스는 그를 알아본다. 팔리누루스가 원하는 것도 거창하지 않다. 장례였다.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세상이 인정해 주는 것, 그의 몸을 누군가 거두어 주는 것, 이름을 불러주는 것, 그리고 마침내 떠나보내는 것. 아이네이아스는 약속한다. 그를 묻어주겠다고. 그리고 그 약속이 이루어져야 팔리누루스도 비로소 저승의 문턱을 넘어갈 수 있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얼마 전 썼던 「죽은 몸에 대한 예의」가 떠올랐다. 죽은 몸은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살아 있는 사람들이 더 조심해야 한다. 산 사람의 몸에는 치료라는 목적이 있지만, 죽은 사람의 몸에는 더 이상 치료할 수 있는 미래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몸을 함부로 다룰 수 없다. 왜일까. 그 몸이 한때 한 사람의 몸이었기 때문이다. 장례는 죽은 사람을 위한 마지막 의례이면서 동시에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마지막 시험인지도 모른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서사시에서 장례는 단순한 풍습이 아니었다. 죽음을 완성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전쟁의 전사자들을 생각하게 된다. 전쟁이 끝났지만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이름을 확인하지 못한 채 산과 들에 남겨진 사람들, 가족에게 시신조차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 오랜 세월 이름 없는 유해로 남아 있던 사람들. 전쟁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끝났지만, 그들에게는 끝나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전쟁의 진정한 끝은 휴전협정에 서명하는 날이 아니라, 마지막 죽은 자가 자기 이름과 자리로 돌아가는 날인지도 모른다.

부산의 UN기념공원을 걷다 보면 이 생각이 더 선명해진다. 그곳에는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유엔군 장병들이 잠들어 있다. 그들은 대부분 젊었다. 먼 나라에서 와서 한국 땅에서 죽었다.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들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묘비에는 이름이 있고, 국적이 있고, 생몰 연도가 있다. 그 이름을 따라가다 보면 전쟁이 숫자가 아니라 사람으로 바뀐다. 몇 명이 죽었다는 통계가 아니라, 누가 죽었는가. 그것이 된다.
전쟁은 사람을 숫자로 만든다. 전사자 몇 명. 실종자 몇 명. 부상자 몇 명. 그러나 장례는 다시 사람으로 돌려놓는다.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그가 살았던 시간을 기억하고, 그가 누워 있을 자리를 마련한다. 그래서 장례는 기억의 가장 오래된 형태인지도 모른다.
오디세우스의 저승에서 엘페노르는 말한다. 나를 잊지 말라고. 아이네이아스의 저승에서 팔리누루스도 기다린다. 나를 묻어달라고. 둘은 대단한 영웅이 아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두 서사시에서 이들은 매우 중요하다. 영웅이 미래를 묻기 전에, 이름 없는 죽은 자가 먼저 자신의 자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고대 서사시가 우리에게 주는 아주 오래된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미래를 묻기 전에 죽은 자의 장례부터 완성하라.
그렇게 생각하면 아이네이아스가 아버지를 업고 트로이를 빠져나오는 장면도 다시 보인다. 그는 아버지를 버리지 않았다. 아버지를 등에 업고 갔다. 아들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새로운 삶을 향해 걸었다. 그에게 귀환은 미래로 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미래는 과거를 버리고 얻는 것이 아니었다. 죽은 아버지를 등에 업은 채 가는 미래였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의 문명이 이어지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앞을 바라보면서도 뒤에 있는 사람을 완전히 버릴 수 없다. 죽은 자를 기억하고, 그들에게 자리를 마련하고, 그들의 이름을 불러준 다음에야 비로소 살아 있는 사람은 앞으로 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요즘 ‘귀환’이라는 말을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산 자에게 귀환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죽은 자에게 귀환은 무엇일까.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 고향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 이름을 되찾는 것일 수도 있다. 혹은 누군가의 기억 속으로 돌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
오디세우스에게는 이타카가 있었다. 아이네이아스에게는 새로운 땅이 있었다. 엘페노르에게는 아직 치러지지 않은 장례가 있었다. 팔리누루스에게는 아직 건너지 못한 강이 있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의 이름 없는 전사자들에게는 아직 찾아야 할 이름이 있었다.
그렇다면 어쩌면 귀환에는 두 가지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산 자의 귀환과 죽은 자의 귀환. 하나는 집을 찾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억 속에서 자기 자리를 되찾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둘을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 두 길이 다시 만날 수 있도록 기억의 다리를 놓는 일일 것이다.
산 자는 집으로 돌아가고, 죽은 자는 기억으로 돌아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