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석의 시선] 통영상륙작전의 영웅 김성은(金聖恩) 장군

북한의 남침으로 대한민국이 백척간두(百尺竿頭),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놓여 있던 1950년 8월 16일, 손원일 당시 해군참모총장은 킨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Kean) 작전 참가 후 진해에 집결해 있던 김성은 부대장에게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통영반도 탈환을 지시한다.
당시 통영을 점령 중이던 인민군은 제7사단 제51연대와 제104치안연대 소속 650명 규모였다. 대대급 규모의 김성은 부대 병력 330명은 해군 상륙지원함 2척과 공군 T-6 편대 및 F-51D 전투기 3대의 지원을 받으며, 2배 규모의 인민군 병력과 일생일대의 한판 승부를 벌인다.
김성은 대령은 먼저 어선을 징발해 8월 17일 오후 6~7시 통영반도 동북방 장평리에 제2중대, 제3중대, 제7중대, 중화기중대, 본부중대 순으로 상륙을 완료했다. 인민군은 국군이 통영 항구 정면에 상륙할 것으로 판단하고 망일봉 고지에 배치했던 병력을 야간에 남망산 및 해안선으로 이동시켰다.

8월 18일 오전 5시, 통영 내 목표 지점에 대한 공격이 개시됐다. 제2중대, 제3중대, 제7중대는 고지를 확보하고 참호를 구축해 방어 태세를 갖췄으며, 부대 본부는 동달리에 위치해 전반적인 작전을 지휘했다. 김 대령은 8월 18일 정오 무렵 제2중대에 원문고개를 계속 확보하도록 명령했고, 제3중대와 제7중대에는 시가지에 대한 일제 공격을 지시했다.
같은 날 오후 2시 통영 시내에서 시가전이 벌어졌고, 전투 이후 적 주력은 서북방으로 퇴각했다. 이어 18일과 19일 양일간 통영 시내에 잔존하던 인민군을 소탕하고 주변 고지를 점령한 뒤 원문고개 방어에 주력했다. 그러자 8월 19일 오후 3시 40분경부터 인민군은 원문고개 방면으로 약 3시간 동안 포탄 580발을 퍼부은 뒤 제2중대와 제7중대 진지를 공격했다. 8월 20일 새벽 2시 40분, 인민군은 원문고개 남방 양 해안선을 따라 침투했다. 그러나 김성은 부대는 8월 19일부터 20일까지 이어진 수차례 공격을 모두 격퇴하며 원문고개 방어에 성공했다.
양측 병력 손실은 아군 해병대가 소수의 사상자를 낸 반면, 인민군은 총병력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469명이 사살되는 참패를 당했다. 대한민국 해병대의 완벽한 승리였다.
이는 해병대 창설 후 최초이자, 6·25전쟁 발발 이후 국군이 단독으로 수행해 성공한 최초의 상륙작전이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통영반도를 탈환했을 뿐 아니라 원문고개 방어에도 성공하면서 낙동강 방어선 서부지역 안정화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됐다.
이 작전은 또 하나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미국 뉴욕 <헤럴드 트리뷴> 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 특파원이 ‘통영상륙작전’ 보도 기사에서 “They might capture even the devil(한국 해병대는 악마조차 잡을 정도였다)” 혹은 “Ghost-Catching Marines”라는 표현으로 한국 해병대를 칭송했고, 여기서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별칭이 유래됐다는 설이다.
비록 나중에 히긴스 기자가 실제로 그런 표현을 썼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김성은 부대의 용맹성만큼은 세계 전사(戰史)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쾌거로 기록돼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인물이 바로 김성은이다. 1924년 12월 20일 경상남도 창원군 상남면 가음정리(현 창원시 성산구 가음정동)에서 태어난 김성은은 1946년 조선해안경비대 사관학교에 입학해 소위로 임관했고, 1949년 대한민국 해병대가 창설된 후 초대 사령관 신현준의 권유로 해병대 창설 멤버가 됐다.
6·25전쟁 초기 대대급 규모에 불과했던 해병대를 야전에서 진두지휘했으며, 이들은 그의 이름을 따 ‘김성은 부대’ 혹은 ‘김 부대’라고 불렸다. 마산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특히 마산 진동리 전투와 통영상륙작전 등 여러 전투에서 연전연승했다.
그는 1960년부터 1962년까지 제4대 해병대사령관을 지냈는데, 재임 중이던 1961년 5·16 군사정변이 발생했다. 당시 해병대에서도 대대급 부대가 한강대교에서 헌병과 총격전을 벌이는 등 쿠데타에 가담했지만, 강직했던 김성은 사령관은 5·16에 동참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그 과정에서 쿠데타 와중에 자칫 살해당할 뻔하기도 했다. 그러나 5·16이 성공한 뒤 군정을 인정하고 군사혁명위원회에 참여하면서 사령관직을 유지했다.
1963년 그는 역대 최연소(38세)이자 최장수 재임(1968년까지 59개월), 그리고 유일한 해병대 출신 국방부 장관(제15대)으로 임명돼 베트남전 파병 등을 수행했다. 그러나 1·21 사태 직후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베트남전 파병을 앞두고는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미국 국방장관과 담판을 벌여 군원물자 지원과 한국 경제개발 지원금 원조(KIST 설립 지원) 등을 얻어내기도 했다.

또 그의 업적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 이름(聖恩·성스러운 은혜)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외조모에 이어 모친 안명주(安明珠) 권사의 “죄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죄인을 용서하는 것뿐”이라는 가르침 속에서 신앙의 기초를 다진 김성은은, 이 신앙을 군 생활과 지휘 철학의 중심에 두고 살아갔다. 김성은 스스로도 간증과 회고록을 통해 어머니의 기도와 가르침이 자신의 신앙의 뿌리이자 성공의 동인(動因)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평생 술과 담배를 멀리했던 그는 부하를 다루는 데 있어서도 해병대 특유의 스파르타식 훈육보다는 자애와 설득을 앞세우는 독특한 지휘 방침을 유지했고, 이는 주변으로부터 많은 존경과 찬사를 받았다. 서울 중구 신당동 신일교회 초대 장로로 섬기던 그는 2007년 5월 15일, 82세를 일기로 소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