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턴 워커 장군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 제8군 사령관으로 투입돼, 전쟁 초기 가장 절망적인 국면을 책임진 지휘관이었다. 그의 구호는 명확했다. “절대사수(Stand or Die).” 이는 선동이 아니라 냉혹한 현실 판단이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공간이 없는 낙동강 방어선에서 부산 교두보를 지켜내기 위해, 그는 기동방어라는 선택으로 전선을 떠받쳤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워커는 무엇보다 예비를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를 두고 고심했다. 그가 1948년 미 제8군 사령관에 임명될 당시, 참모장 유진 M. 랜드럼 대령과 함께 부임했다. 랜드럼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네 차례나 사단장을 지낸 노장 지휘관이었다. 1941년 제7보병사단장, 1943년 제87보병사단장,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제90보병사단장, 그리고 제71보병사단장까지 역임했지만, 종전 후 원 계급인 대령으로 복귀했다. 워커는 그에게 늘 “제너럴 랜드럼”이라 부르며 예우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오늘은 나에게 예비대를 얼마만큼 주겠소?”
마산–함안 지구에서 북한군 제6사단이 측방기동으로 돌파를 시도했을 때, 워커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미 제25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에게 킨 특임대(Task Force Kean)를 편성하게 해, 하루 밤사이 180킬로미터를 달려 긴급 전환 투입시켰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한 선택이었다. 다부동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적 4개 사단의 압박으로 전선이 붕괴 직전에 몰렸을 때, 워커는 마이켈리스 대령의 미 제27연대를 투입해 간신히 전선을 지켜냈다. 제27연대와 함께 투입된 전차부대의 용전분투로 다부동은 버텼고, 그 공적을 기려 5번 국도는 ‘보울링 앨리(Bowling Alley)’라 불리게 됐다. 오늘날 다부동 전투 전적비가 전차 형상으로 세워진 이유다.
이 모든 대응은 정적인 방어가 아니었다. 위험을 감수한 기동적 대응이었다. 워커는 불이 난 곳마다 달려가 불길을 끄는 소방수처럼, 가장 위태로운 전선에 예비를 투입해 급한 불을 껐다. 냉혹한 판단으로, 전선을 살리는 데 모든 것을 던진 지휘관이었다.
그러나 워커의 전쟁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미 제10군단을 미 제8군 지휘계통 밖에 두고 에드워드 알몬드에게 직할로 맡겼다. 이는 워커의 통합 지휘를 크게 어렵게 만들었다. 알몬드는 계급상 워커의 하급자였지만, 동시에 맥아더 사령부의 참모장이었다. 지휘 체계의 모순이었다. 그럼에도 워커는 공개적으로 불평하지 않았다. 그는 조지 패튼 휘하에서 미 제20군단장을 맡아 기동전을 지휘했던 유럽전선 출신 장군이었다. 상급 지휘의 불합리보다, 눈앞의 전선을 택한 지휘관이었다.
한국전에서의 공적에 가려져 있지만, 워커의 기동전 역량은 제2차 세계대전 로레인 전역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1944년 패튼의 미 제3군은 메츠와 낭시 지역을 확보해 독일 만하임과 마인츠 방면으로 라인강을 도하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파리–베르됭을 거쳐 독일로 이어지는 파리–메츠 축선에서 워커의 제20군단은 제3군의 선봉이었다. 메츠 요새는 단순한 목표가 아니라, 독일군의 완강한 방어 의지와 작전술이 응축된 공간이었다.
이 전선에서 워커가 맞선 상대는 독일 국방군 최고의 전술지휘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헤르만 발크가 지휘한 G집단군이었다. 이 싸움은 단순한 공방전이 아니었다. 기동 대 기동, 결단 대 역기동, 시간을 벌려는 자와 시간을 빼앗으려는 자의 싸움이었다. “휘발유가 있는 한 전진하라”는 패튼의 구호 아래, 워커는 독일군과 절묘한 기동전을 펼쳤다.
로레인 지방은 프랑스와 독일 사이 가장 가까운 직선 통로로, 수세기 동안 전통적인 침입로였다. 1766년 프랑스 영토가 됐고, 보불전쟁 이후 1914년까지는 독일 영토였다. 이후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다가 1940년부터 1944년까지는 다시 독일이 점령했다. 이 지역은 노르망디 해안에서 8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어, 기갑부대 운용에 치명적인 보급 난관을 안고 있었다. 미군 전사에 등장하는 ‘레드볼 익스프레스’ 보급 작전이 전개된 전역이 바로 이곳이다.
워커는 메츠를 단번에 무너뜨리지 않았다. 대신 압박과 회전, 차단을 반복하며 독일군의 선택지를 하나씩 제거해 나갔다. 당시 제20군단은 전술지도조차 없이 미쉐린 도로지도를 사용해 작전을 수행했다. 히틀러는 12군단에 대한 독일군의 역습이 실패하자 A집단군 사령관 블라스코비치를 해임하고 발크를 후임으로 임명했다. 발크 역시 기민한 후퇴와 국지적 반격으로 맞섰다. 이 전역은 문자 그대로 용호상박의 기동전이었고, 워커는 결국 메츠를 공략했다. 제20군단은 기원후 451년 이래 메츠 요새를 함락한 최초의 부대가 됐다.
그 무렵 독일군은 아르덴 공세, 이른바 발지 전투를 감행했다. 독일 제5기갑군은 바스통에서 미 제101공정사단에 발목이 잡혔고, 패튼의 선봉 크레이튼 에이브람스 부대와의 연결작전으로 공세는 종료됐다. 패튼의 진격 지시는 군단 간 협조를 어렵게 만들었고, 미군 전사에서도 논쟁적인 전역으로 남았지만, 워커는 그 속에서도 현실적인 작전을 지휘한 지휘관이었다.
워커 장군의 지휘를 관통하는 핵심은 단순하다. 전선은 지도 위에 있지 않고 병사 앞에 있다는 것, 예비는 숫자가 아니라 결단이라는 것, 지휘관은 불확실성을 회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한국전에서는 소방수였고, 유럽전선에서는 기동전의 창끝이었다. 전쟁의 성격이 달라도 그의 지휘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1950년 12월 23일, 워커는 아들 샘 워커 대위의 훈장 수여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서울 수유리 도로에서 한국군 제6사단 트럭과 충돌해 순직했다. 전쟁터가 아니라, 임무와 책임을 수행하러 가던 길 위에서의 죽음이었다. 조지 패튼의 교통사고와 닮은 최후였다. 오늘이 그 75주기다.
그의 아들 샘 워커는 훗날 대장까지 진급했다. 한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졌던 워커 장군의 이름은 워커힐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지만, 그의 동상은 캠프 험프리로 옮겨졌고, 그의 전기는 최근에서야 우리말로 번역돼 출간됐다. 전선을 떠받친 소방수, 월턴 워커 장군의 명복을 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