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교와 안보의 영역에서 진정으로 값진 기록은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실패의 원인을 끝까지 추적한 성찰에서 나온다. 예전에 일본 방위대를 방문했을 때 일본은 방위대 학생들에게 일본이 승리한 전사는 제쳐두고 일본이 패했던 전투만 프린트물로 가르치고 있음을 보고, 일본이 절치부심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6·25 한국전쟁에서도 우리가 승리했다고 하더라도 무엇이 문제였고, 왜 통일을 달성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정치·전략적 차원에서의 분석이 필요하다고 항상 생각해 왔다. 그래서 2030년 6·25전쟁 80주년이 되기 전에 이러한 작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전쟁 수행보다 더 어려운 것이 휴전 협상이고, 휴전 협상보다 더 지난한 문제가 북한과의 핵 협상이었다. 송종환 전 파키스탄 대사가 집필한 <북한과의 협상 실패: 진실과 해법> 신개정증보판은 바로 그런 기록이다. 남북 협상 실무의 최전선에서 북한과 직접 마주했던 경험, 그리고 외교관 생활을 마친 이후에도 학문적 연구를 멈추지 않고 이론 체계를 완성해 온 집요한 지적 여정이 이 한 권에 응축돼 있다.
필자는 이 책이 처음 세상에 나오기 전, 송 대사의 부탁으로 군사·안보 용어 교정 작업을 도와드리며 먼저 읽어보고 초판의 탄생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그리고 그때 이미 느꼈고 독후감도 작성하였다. 이 책은 단순한 회고록이나 당대 정책 비판서도 아니라는 것을. 남북 대화와 협상을 둘러싼 수십 년의 착각과 자기기만을 정면으로 겨냥한, 일종의 ‘대화징비록(懲毖錄)’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번 신개정증보판은 그 의미를 한층 더 확장한다. 국제 정세는 급변했고, 북한은 더 이상 모호한 핵 개발 ‘의혹국’이 아니라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자신을 규정하고 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부터 이 현실을 직시한다. 북한이 말하는 ‘평화’, ‘비핵화’, ‘민족공조’, ‘협상’은 남한과 국제사회가 이해하는 그 개념과 본질적으로 다르며, 그것은 레닌식 혁명 전술의 연장선에 놓인 전략적 언어임을 분명히 한다. 북한에게 협상은 상호 타협의 장이 아니라, 전쟁에서 달성하지 못한 목표를 다른 방식으로 추구하는 계속된 투쟁이라는 점을 수십 년의 경험으로 증언한다.
비핵화라는 용어만 보더라도 한미가 말하는 비핵화는 ‘북한 비핵화’인데, 북한은 ‘한반도 비핵지대화’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즉, 주한미군이 핵을 갖고 있으니 주한미군을 철수하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핵의 범주 역시 과거핵, 즉 핵무기 자체만인지, 아니면 핵무기를 만드는 시설과 인원까지도 포함하는 미래핵까지 뜻하는지 서로가 사용하는 용어의 개념 정의가 엇박자를 내니, 만나서도 엉뚱한 소리만 쳇바퀴 돌리듯 반복해 왔다. 이러한 협상 결렬의 이유를 정확히 짚고 있는 책이다. 남북 간에, 특히 협상 과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개념과 범주가 다르면 결론이 나지 않는 현상을 지적하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하와이를 중심으로 태평양을 반분하려는 중국 시진핑의 팽창 기도를 알지 못했던 바이든 대통령과는 달리, 제1도련선(일본 남단 사세보, 오키나와, 대만, 필리핀, 남중국해, 말레이시아를 연결하는 선)에서 봉쇄하려는 전략에 한국이 어떤 군사·안보 전략을 택해야 하는지를 지적한 것도 탁견이다.
최근 한미 정상회담으로 핵추진 잠수함 건조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빨라야 5~7년이 걸리는데도 대통령 임기 내 전시작전권을 전환하겠다는 한미 국방장관 간 제57차 한미안보협의회(SCM) 공동성명이 주한미군 철수로 불똥이 튈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에 대하여, 전략 문제를 연구하는 본인으로서는 공감하는 바가 크다.
이 개정증보판의 또 다른 가치는 ‘시간’이다. 현장에서 뛰던 실무자의 기록에 학자로서의 성찰이 덧붙여졌고, 다시 역사적 거리 위에서 재검증됐다. 이는 동일한 사안을 두 번 해석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 전체가 축적한 인식의 진화다. 처칠이 총리 재임보다 『제2차 세계대전사』로 더 오래 기억될 것이라 했듯이, 송 대사님의 외교적 직함보다 이 연구 성과가 더 길게 남을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제 체리가든에서 열린 신개정증보판 출판기념회는 그 상징적 장면이었다. 많은 이들이 정치인의 말과 당장의 정책에 주목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이 책은 지금을 위한 책이 아니라, 훗날 우리가 어디서 길을 잘못 들었는지를 설명해 줄 지도이자 나침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남북 협상 당사자의 생생한 체험을 분노나 미화 없이, 차가운 언어로 정리해 후세에 남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을 감수하는 작업이자, 책임을 지는 지적 노동이다.
송종환 대사의 학문적 집요함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신개정증보판에는 최근 미·중 패권 경쟁, 북·중·러 결속 심화, 북핵 고도화, 그리고 한미동맹 구조 변화까지 포괄하는 분석이 추가됐다. 특히 ‘북한이 변할 것이라는 기대’가 아니라, ‘북한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 위에서 한국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묻는 대목은 불편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질문이다.
이 책은 독자에게 위안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왜 우리는 반복해서 속았는가”, “왜 실패의 원인을 상대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서 보려 하지 않았는가”를 묻는다. 그래서 더 가치 있다. 협상의 실패를 인정하지 못하는 국가에게 미래는 없다. 실패를 정확히 기록하고, 구조적 원인을 분석할 때에만 다음 선택의 기준이 생긴다.
신개정증보판의 출간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린다. 그리고 이 책이 짧은 시평으로 소비되지 않고, 한국 외교·안보 담론의 ‘기본 문헌’으로 남기를 바란다. 권력은 잠시지만, 진실을 기록한 문장은 오래 남는다. 송종환 대사께서 피로써 한자 한자 아로새긴 이 기록은 분명 후대의 질문에 답이 될 것이다. 큰 이정표를 다시 보강하여 남기신 학문적 열정과, 노구에도 지적 호기심을 견지하신 저자의 열정에 경의를 표한다. 여러분의 일독을 적극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