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미친선군민협의회장과 한국전략문제연구소 이사장을 지낸 박정기 회장(전 한전 사장, 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이 그동안 10권의 저서를 펴냈는데, 노년에 집필한, 아마도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작품으로 보이는 이 임진왜란 역사소설 <붉게 물든 노을>을 출간했다.
박정기 회장은 사관학교 생도(육사 14기) 시절 럭비 선수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검도에도 상당한 식견을 갖고 있는 듯해 검술에 대한 묘사가 매우 상세하다.
서재에는 일본의 정치·역사·문화·군사 관련 서적이 즐비하며, 이미 미국의 ‘남북전쟁’을 다룬 상·하권 저서와 30만 부 이상 판매되어 화제가 된 <어느 할아버지의 평범한 이야기>를 출간했다. 또한 작년에는 증손주들에게 남기는 <어느 증조할아버지의 평범한 이야기>를 집필했다. 제목은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그 내용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할아버지가 손주에게 조용히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번에 펴낸 <붉게 물든 노을>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파병되었다가 귀화해 조선을 위해 복무한 두 명의 항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처음 부산 왜관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의 부하 사사키의 이야기를 접하며 항왜 김충선의 이야기인가 생각했으나, 후반부에 사야가 김충선의 이야기가 별도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다른 인물로 설정된 듯하다.
사사키는 가토 기요마사의 측실이 그에게 연정을 품으면서 사건이 발생하자 탈번해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의탁하게 되었고, 이후 대마도로 보내졌다가 다시 부산진 왜관으로 오게 된다. 그는 조선 여인을 아내로 맞아 대마도로 돌아갔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봉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된다. 그러나 전쟁이 아닌 민중 학살이 자행되는 현실을 보고, 이것이 사무라이가 취할 태도가 아니라고 판단해 대마도주 진영을 이탈하고 곽재우 휘하에서 조선을 위해 싸우게 된다.
홍의장군 곽재우 휘하 병사들과의 갈등 속에서 투항하는 과정은 비교적 설득력 있게 묘사되어 있다. 이후 그는 조선군에게 조총과 검술을 교육했고, 곽재우가 당파 싸움에 환멸을 느껴 낙향하자 이괄의 휘하에서 종군하게 된다.
이괄은 항왜들을 대거 모집해 훈련시켰고, 1624년 이괄의 난 당시 사사키는 반란군 선봉으로 활약하며 관군을 상대로 우회·기동 작전을 전개한다. 그러나 안산 전투에서 기상 악화로 패배하게 되는 과정 역시 비교적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설명되어 있다.
이괄은 결국 광주 경안역에서 부하 장수들에 의해 살해되고, 그의 목이 관군에 바쳐지면서 반란은 실패로 끝난다. 저자는 이괄이 인조반정에서 공을 세운 유능한 무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조를 끝까지 추격하지 않은 점을 패인의 핵심으로 지적한다.
또 다른 인물은 항왜 이케다다. 그는 사사키와 함께 호위무사로 활동했던 인물이지만, 조선 관군에 합류하게 된 과정은 상대적으로 상세히 서술되지 않아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이야기의 중심축은 사사키에게 더 기울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두 사람은 약 30년이 흐른 1624년 겨울, 한양 근교 안산 자락에서 운명적인 일대일 결투를 벌인다. 관군 소속의 이케다와 반란군 선봉인 사사키의 대결에서, 사사키는 더 뛰어난 검술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반란의 실패를 직감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이 소설은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전개되기에 사실처럼 느껴지며,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약 1만 명의 일본 병력이 조선에 잔류했다는 점, 이후 사르후 전투에서 조총병이 투입되었다는 기록 등을 고려하면 충분한 개연성을 지닌다. 다만 사사키가 임진왜란 이튿날 경상좌병사 박진에게 귀순했다는 설정은 역사 기록과 다소 상충되는 부분으로 보인다.
또한 사사키가 귀순 후 ‘이용’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며, 대마도에 남겨진 조선인 아내 예라의 이후 삶이 언급되지 않은 점은 서사적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사사키의 조선 생활은 매우 상세하게 묘사되어 실존 인물인지 혼동될 정도지만, 이케다의 관군 생활에 대한 설명은 상대적으로 부족해 균형 면에서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작품에서는 ‘크로노스의 시간’과 ‘카이로스의 시간’이라는 개념을 통해 객관적 시간과 의미 있는 순간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서사에 철학적 깊이를 더해준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통신사의 파견 배경과 귀국 후 보고를 둘러싼 논란, 일본에서의 체류 과정, 그리고 한산도·명량·노량 해전과 충무공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도 흥미롭게 전개된다.
일본 측 기록과 조선 내부 상황, 강화 회담을 둘러싼 서사는 작품의 몰입도를 높이며, 방대한 내용을 한 권으로 압축해낸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또한 정여립 사건, 울산 전투, 북관대첩, 인조반정, 이괄의 난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흐름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있으며, 정문부 장군과 신각 장군과 같은 비운의 인물들에 대한 서술도 인상적이다. 판옥선과 아타케부네의 특징에 대한 설명 역시 이해를 돕는다.
다만 재판 시 수정이 필요한 오탈자가 일부 발견된다. p.188 ‘장발’은 ‘정발’로, p.194 ‘상항’은 ‘상황’으로, p.285 ‘전쟁을’은 ‘전쟁이’로, p.292 ‘금위령’은 ‘금위영’으로, p.293 ‘공명법’은 ‘공명첩’으로 수정이 필요하다. 또한 히데요시의 사망 원인, 정문부 장군의 사망 연도, 이괄의 최후 위치 등은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재검토가 요구된다.
충무공에 대한 평가와 관련해서도 단재 신채호와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의 언급이 추가되었다면 더욱 의미가 깊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기 회장은 이 작품을 통해 임진왜란 전후사와 항왜의 활동을 아우르는 하나의 통사를 완성해냈다.
역사적 사실과 서사를 결합한 이 작품은 단숨에 읽힐 만큼 흡입력이 있으며, 독자에게 일독을 권할 만한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