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으로 간 이토, 안중근 의사의 총성 앞에 멈춰 서다

오늘은 북만주 흑룡강 지역에서 가장 깊은 역사적 의미를 간직한 장소를 방문하는 일정이다. 그곳은 하얼빈역과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다. 이 공간의 주인공은 안중근 의사(1879~1910)이며, 상대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하 이토) 공작이다.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약소국의 강렬한 대항 방식으로 볼 수 있는 안중근의 이토 암살 계획과 추진 과정은 러시아 역사 기행에서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주인공인 이토는 무슨 목적으로 하얼빈에 오게 되었으며, 어떤 경로로 이동했을까? 역사 여행자로서 당시의 시대상과 정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이토는 1841년 조슈번, 오늘날 야마구치현 하기시 외곽의 가난한 마을에서 농민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신분만으로 따지면 이른바 ‘흙수저’에 가까운 최하층민이었다.
그러나 그의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찾아왔다. 아버지가 주겐, 곧 준무사 신분인 미즈이 집안에 입양되면서 이토도 준무사 신분이 되었다. 주겐 신분에게는 교육받을 권리가 주어졌다.
이토는 16세가 되던 해 하기시 외곽에 세워진 사립학교 송하촌숙, 일본어로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 입학했다.

송하촌숙은 일본 근대 정신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이 1857년 설립해 문하생들을 양성한 곳이다. 요시다 쇼인은 아편전쟁과 미국 페리 함대의 함포외교를 목격하며 일본이 서양의 식민지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나약한 도쿠가와 막부 체제를 무너뜨리고 천황 중심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조선을 정벌하고 만주로 진출하는 것만이 일본의 위기를 타개하는 길이라고 설파했다. 정한론과 대륙진출론으로 이어지는 극우 민족주의 논리였다.

그의 문하생들은 대부분 하급 무사 출신이었다. 이들은 19세기 중반 부패하고 나약해진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는 데 주역이 되었고, 마침내 메이지 천황을 옹립했다.
가장 뛰어났던 다카스기 신사쿠는 29세에, 구사카 겐즈이는 25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들 선발 주자는 전쟁과 혁명 과정에서 먼저 쓰러졌다. 메이지유신의 3걸로 불린 사이고 다카모리(1828~1877), 오쿠보 도시미치(1830~1878), 기도 다카요시(1833~1877) 같은 당대 최고의 영걸들도 오래 살지 못한 채 혁명의 광풍 속으로 사라졌다.
반면 이토 히로부미(1841~1909)와 야마가타 아리토모(1838~1922) 같은 후발 주자들은 살아남았다. 하급 무사 출신 생존자들이 일본 근대화를 이끄는 혁명의 주역이 된 것이다.
이토는 메이지 정부 초기부터 네 차례에 걸쳐 총리대신을 역임했다. 19세기 말 일본 최고의 정치가로 성장했으며 문민 세력을 대표했다. 야마가타는 육군대장으로 두 차례 총리대신을 역임했고, 군부를 대표하는 대륙진출론의 강경파였다.
일본 측 사료는 이토를 근대화의 이념으로 무장한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조정 능력과 협상력을 지닌, 온건하고 유연한 문민 관료로 평가한다. 1905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서양 각국으로부터 대한제국에 대한 독점적 권한을 인정받으려 했다. 일본은 원로이자 능수능란한 협상가인 이토를 파견했다.
이토는 고종과 대신들을 겁박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도록 했다. 이어 통감부를 설치하고 1906년 2월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일본 역사가들은 “이토는 조선 통감으로 내정됐으나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다. 적임자가 없는 상황에서 노련한 협상가를 보내려는 천황의 뜻에 따라 부득이하게 갈 수밖에 없었다”고 기술한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이토는 독배를 마신 셈이었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화신으로 인식되었고, 조선 민족에게는 공적이자 침략의 원흉으로 공격받는 대상이 되었다.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일본은 화근을 제거한다는 명분 아래 고종에게 책임을 물어 강제 양위를 관철했다. 일본 측 자료에 따르면 온건파였던 이토는 군부와 외무성 강경파가 주장한 조기 합병론에 반대하며, 보호정치를 좀 더 지속하면서 상황을 지켜보자는 입장이었다.
이토는 그해 9월 백작에서 공작으로 승작했다. 평민 출신으로서는 최고 작위인 공작까지 오른 것이다.

도쿄에 머물던 이토는 자신을 숭배하던 고토 신페이(1857~1929)를 만나 천하의 경륜을 들었다. 고토 신페이는 의사 출신으로 법의학과 감염병에 정통했으며, 내무성 위생국장을 지냈다.
1898년 대만총독으로 부임한 고다마 겐타로 육군중장을 보좌해 9년 동안 민정장관을 역임하며 행정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남만주철도 건설에 관여하고 만철 총재를 지냈으며, 체신대신으로 재직했다. 외교와 의료, 과학, 토목 등 여러 분야에 박학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칭 ‘대아시아주의자’였지만, 실제로는 한국과 만주를 통합적으로 경영하고 평양에 ‘고려총독부’를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한 제국주의 신봉자였다.
고토 신페이는 이토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일본은 러시아와 청국을 중심으로 외교정책을 펼쳐야 한다.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인물은 이토 공작뿐이다. 이 기회에 조선 통감에서 물러나 경세가로서 아시아 대륙을 여유 있게 여행하라.” 강한 자부심의 소유자였던 이토는 이 무렵 만주 외유를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1909년 2월 도쿄로 돌아온 이토는 통감 취임 3년 반만에 체력적인 한계에 봉착했다. 조선에서는 송병준의 일진회와 도야마 미쓰루, 우치다 료헤이가 이끄는 흑룡회 등 강경 민간 세력이 한일병합운동을 전개하며 이토를 압박했다. 야마가타가 이끄는 강경 군부의 영향을 받던 가쓰라 다로 총리와 고무라 주타로 외무상도 이에 가세했다.
일본 측 사료에 따르면 중과부적의 상황에 놓인 이토는 성급한 합병에는 반대한다며 통감직에서 물러났다. 후임으로는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를 추천했다. 이토의 사직은 결과적으로 합병 추진의 장애물이 제거됐음을 의미했다. 그는 이후 천황 직속의 추밀원 의장으로 임명됐다.
1909년 6월 통감직에서 물러났지만, 이토는 조선 민족의 깊은 원한을 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앞으로의 일이 결코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이토는 일본과 동양을 넘어 세계를 향한 꿈을 품으며 자신의 구상과 만주 외유를 준비했다. 이 대목에 대한 일본 측의 해석은 한국과 중국의 역사 인식과 일치하지 않는다. 한국 학계에서는 이토의 외유 목적을 “만주의 분할 문제를 러시아와 논의하고, 대한제국의 병합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의도였다”고 본다. 다만 수행원 가운데 외무성 관리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 등을 근거로 다른 해석을 제시하는 견해도 있다.
주러시아 일본 공사의 주선으로 러시아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의 회담 일정이 하얼빈에서 잡혔다. 이토는 영자신문 <재팬 메일>의 영국인 주필 브링클리와 만난 자리에서 “이번 외유는 위험하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항상 위험에 노출돼 있다. 내가 우려하는 마지막 문제는 대한제국이다. 그 문제만 해결되면 걱정할 것이 없다.”
조선 문제에 대한 그의 불안과 집착이 배어 있는 말이었다. 비록 조선 정부는 부패하고 나약했지만, 선각자와 선비, 군인들이 지닌 살아 있는 구국 정신과 저항 의지를 조선에서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었을까.
이토는 천황의 재가를 받아 만주 출장길에 올랐다. 1909년 10월 14일, 이토는 오이소 별장을 떠났다. 단도 두 자루와 칼이 들어 있는 지팡이를 짚고 기차에 올랐다. 그는 말년에 도검류에 취미를 갖고 있었다.
수행원으로는 귀족원의원 무로타, 육군중장 무라타, 추밀원 의장 비서관 후루야, 궁내대신 비서관이자 한시의 대가였던 모리 등이 합류했다. 의원과 군 장성이 포함된 것은 이토가 원로이자 추밀원 의장이었다는 점에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반면 한시 작가인 모리가 동행하고 외교관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번 외유의 성격을 짐작하게 한다고 일본 측은 설명한다.

이토는 10월 15일 바칸, 오늘날의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다. 그는 춘범루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하급 무사 시절과 청일전쟁 뒤 리훙장과 강화협상에 나섰던 시절을 회상했다.
다음 날인 10월 16일, 중국 다롄항으로 향하는 배편이 있는 기타큐슈 모지항을 출발했다. 18일 요동반도의 다롄항에 도착했고, 19일에는 다롄 관민합동 환영회에 참석해 이렇게 말했다. “이번 여행은 유람에 불과하다. 만주를 직접 보아두면 훗날 문제가 발생했을 때 도움이 될 것이다. 만주의 평화는 일본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이 대목에서 이토는 군부 강경파의 만주 경영론과 일정한 거리를 두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10월 21일 동청철도 기관지 ‘하얼빈 웨스트닉’은 “이토의 만주 방문은 개인적인 유람이나 천황이 내린 포상 휴가가 아니다. 그는 남만주철도에 관한 모든 문제를 처리할 권한을 정부로부터 위임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토의 일정과 동향은 신문을 통해 시시각각 알려지고 있었다.
안중근 역시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일간지 ‘대동공보’의 연락과 하얼빈에서 발행되던 ‘원동보’를 통해 이토의 도착 일정을 면밀히 계산하고 있었다.
10월 25일 이토 일행은 남만주철도를 이용해 펑톈, 곧 봉천을 거쳐 창춘에 도착했다. 당시 창춘은 관성자라고도 불렸다. 창춘역부터 하얼빈까지는 러시아가 관할하는 철도 구역이었다. 그날 밤 11시, 일행은 러시아 철도총국이 마련한 특별열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향했다. 원래 창춘에서 하얼빈까지는 약 6시간이 걸렸으나, 오전 9시 도착 일정에 맞추기 위해 중간역에 정차하며 시간을 조정했다.
전용 객차에는 러시아 측 환영위원인 아파나시예프 소장이 찾아왔다. 이토는 식당차에서 열린 다과회에 참석해 샴페인으로 건배했다. 그것이 죽음을 앞둔 마지막 건배가 될 줄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10월 26일 오전 9시,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기온은 영하 5도였다. 북만주의 차가운 기운이 몸속 깊이 스며드는 날씨였다.
러시아 재무장관 코콥초프가 수행원을 거느리고 열차 안으로 들어와 이토에게 인사했다. 이토는 약 20분 동안 대화를 나눈 뒤 하차를 준비했다. 러시아군 의장대의 열병 행사는 당초 일정에는 없었으나, 코콥초프가 열병을 권하면서 즉석에서 진행됐다.
오전 9시 30분, 이토는 러시아군 의장대 사열을 마치고 각국 영사단과 일본인 거류민 대표들이 서 있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환영을 알리는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다. 열병 행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차가운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총성이 연이어 울렸다. 이토의 몸이 튕겨지듯 흔들렸고, 그는 뒤로 물러섰다. 다시 총성이 이어졌다.
총성이 멎는 순간 외침이 울려 퍼졌다. “코레아 우라! 대한국 만세!” 몸집이 작은 한 남자, 안중근이 러시아군 장교들에게 제압당했다.
코콥초프와 일본인 수행원들이 쓰러지는 이토를 부축했다. 그를 열차 안으로 옮긴 뒤 중앙 테이블 위에 모포를 깔아 임시 침대를 만들었다. 일본인 의사 고야마와 러시아인 의사가 이토의 옷을 벗겼다. 오른쪽 가슴과 복부에서는 선혈이 쏟아지고 있었다.
“누가 쏘았는가?”
“다른 다친 사람은 없는가?”
“어리석은 녀석….”
이토는 세 마디를 중얼거린 것으로 전해진다. 오전 10시, 맥박이 완전히 멎었다. 이토는 눈을 감았다.
그의 유해를 실은 특별열차는 오전 11시 40분 하얼빈을 출발해 창춘으로 향했다. 세기의 암살 사건은 동북아시아에 거대한 파장을 몰고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