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순의 아무르 답사기 32] 정일권의 파란만장한 현대사…연해주에서 만주군까지
1917년 11월 21일, 우수리스크 외곽 수이푼(추풍)의 한 고려인 가정에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러시아식 이름인 ‘이켄 테이(ИккЭн ТЭи)’를 지어주었다. 오늘 우리는 우수리스크 외곽에서 태어난 고려인 ‘이켄 테이’의 삶을 통해 폭풍우 같은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일면을 추적해본다.
‘이켄 테이’의 아버지는 1908년경 함경북도 경원에서 러시아로 이주한 정기영(1880년대 후반 출생 추정)이라는 고려인(카레이츠·조선 말기 함경도에서 러시아로 이주한 조선인)이었다. 정기영의 고향은 두만강에서 2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경원의 접경 마을이었다.

함경도 출신 조선인들은 1860년대부터 배고픔과 관리들의 탐학을 피해 러시아로 불법 이주해왔다. 그러나 정기영의 러시아 이주 동기는 그들과 달랐다. 그는 아버지가 소유한 토지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 장교가 되기 위해 이주한 경우였다.
넓게 보면 정기영은 1905년 을사강제늑약 이후 망국의 한을 품고 탈출한 조선 말기의 망명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체구가 건장하고 성격이 괄괄했던 정기영은 1908년 “나라 꼴이 아무래도 일본놈들에게 먹힐 것 같다. 러시아군에 입대해 때가 되면 동지들을 데리고 일본놈들을 치러 오겠다”며 탈출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홀몸으로 연해주 우수리스크까지 이주해 함경도 출신 동포들의 도움을 받으며 러시아어를 익혔고, 러시아 국적 취득에도 성공했다.
탈출 후 2~3년 만에 국적을 취득하고 러시아 사회에 적응한 것을 보면, 정기영은 매우 영리하고 대인관계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던 듯하다.
그는 러시아제국 육군 장교에 지원했다. 우수리스크 보병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 뒤, 바라던 대로 러시아제국 극동주둔군의 조선어 통역장교가 되었다.
그는 우수리스크 추풍 지역에서 육군 중위로 복무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적극적으로 고려인들의 어려운 처지를 도왔다. 또한 추풍 지역 고려인(카레이츠) 부락의 한인학교 후원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함경도 출신 조선인 여성 김순복(1893년생)과 중매결혼해 1917년 세 번째 아이를 얻었는데, 그 아이가 바로 ‘이켄 테이’였다. 형들이 어려서 병사했기 때문에 이켄 테이가 외아들이었다.
이켄 테이가 태어난 1917년, 러시아에서는 혁명의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레닌이 주도한 볼셰비키 10월 혁명은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제를 무너뜨리고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했다.
우수리스크에 정착한 고려인들에게도 혁명의 여진은 거세게 밀려왔다. 소비에트 정권의 수립은 소규모 토지 자산가로 정착해 있던 고려인들의 생계를 뿌리째 흔들었다.
제정 러시아의 통역장교였던 정기영의 집안에도 폭풍이 몰아쳤다. 정기영은 러시아군에서 면직되고 감시 대상자가 되어 소비에트 당국에 구금되었다. 다만 일본을 증오해 러시아로 망명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정기영은 연해주에 남아 재기할 기회를 노렸지만, 사회주의 혁명의 대세는 제정 러시아 체제에 속해 있던 그 같은 조선인에게 더 이상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1922년 6월 정기영은 부인 김순복에게 아이를 데리고 함경북도 경원의 할아버지 정좌진 댁으로 돌아가라고 권했다. 자신은 우수리스크에 남아 시베리아 내전의 동향을 살폈다. 가족을 먼저 보내고 다시 일자리를 알아보려 했지만, 볼셰비키 세상이 되어버린 연해주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섯 살 이켄 테이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우수리스크를 떠나 육로로 중국 훈춘을 향했다. 험난한 500리 귀향길에서 마적 떼를 만나 소지품과 금품을 모두 빼앗기는 곤경을 겪으며 모자는 겨우 훈춘에 도착했다. 이어 두만강을 뗏목으로 건너던 중 불어난 물살에 뗏목이 뒤집혀 수십 명 가운데 단 9명만 살아남는 참극이 벌어졌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모자는 함경북도 경원의 할아버지 댁으로 귀향했다. 정기영 가족은 러시아 혁명 이후 반혁명분자로 분류된 고려인들 가운데 만주로 떠나거나 고향 조선으로 돌아간 사례였다. 수천 명의 고려인들이 또다시 유랑길에 올라야 했다.
이켄 테이는 고향 경원에서 한국식 이름 ‘정일권(丁一權)’으로 호적에 올리고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익혔다. 이후 1924년 경원보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정일권의 아버지 정기영은 1924년 러시아에서 경원으로 귀향했다. 귀국한 그는 일본 경찰의 요주의 감시 대상이었다. 일본 당국은 그를 혁명 소비에트의 스파이이거나 독립군과 연계된 인물로 의심해 수시로 연행했다. 결국 그는 불령선인(불순한 조선인)으로 낙인찍혀 집안의 토지까지 빼앗기게 된다.
정기영은 실의에 빠져 술에 의지하며 살았다. 집문서를 술도가에 담보로 맡기고 술을 퍼마시며 집안 살림을 탕진했다. 결국 1927년 아버지의 추상같은 질책을 받은 뒤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만주 쪽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정일권은 다시는 아버지 정기영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보통학교를 마친 정일권은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상급학교 진학이 어려웠다. 향학열에 불타던 정일권은 300리나 떨어진 만주 용정으로 가출하다시피 떠났다. 용정은 간도 지역 조선인 교육의 중심 도시였다. 인구는 3만 명에 불과했지만 중학교가 6개교, 각급 학교가 총 23개나 있었다. 1930년 봄 정일권은 간도의 명문 ‘영신중학교’(후일 광명중학교로 개칭)에 입학했다. 성적이 우수해 입학금을 면제받았다.
정일권은 고학하며 광명중학교(13회)를 1934년 졸업했다. 그의 동기로는 시인 윤동주와 목사 문익환이 있었다. 세 사람은 같은 학교에서 같은 꿈을 꾸며 자랐지만, 이후 극명하게 대비되는 길을 걸었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 속에서 정일권은 국가 권력의 핵심으로, 윤동주는 민족과 독립을 노래한 시인으로, 문익환은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선봉으로 살아가게 된다.
정일권이 광명중학교에 재학하던 시기 만주는 일본군의 침략(1931년 만주사변)으로 ‘만주국’이라는 위성국가가 세워졌다. 만주사변(제1차 중일전쟁)은 조선반도에서 일본인들에게 차별받던 조선 청년들에게 또 다른 탈출구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가자! 만주로!”라는 열풍 속에 많은 청년들이 만주국 관리, 만주군, 만주 건국대학교, 민간회사 등에 지원하게 된다.
정일권 역시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상급학교 진학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애국심이 투철한 학교 교사 장내원의 권유로 학비가 면제되는 ‘만주군관학교’를 지원하게 되었다. 장내원은 정일권에게 “호랑이 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는다는 각오로 만주군 장교가 되어 후배들을 이끌어주어라. 훗날 독립된 조선은 우수한 군 지휘관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1935년, 만 18세가 된 정일권은 봉천(현재의 선양·심양)의 봉천군관학교 5기(정확히는 만주국 육군중앙훈련처 후보생 과정)에 2년 과정으로 입학했다. 그의 동기로는 훗날 국군 창설에 중추 역할을 한 김일환(육군 중장), 김석범(해병 중장), 신현준(해병 중장), 김백일(육군 소장), 송석하(육군 소장) 등이 있었고, 후배 기수에는 백선엽(9기·육군 대장)이 있었다.
정일권은 1937년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우수 생도에게 주어지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편입 혜택을 받았다. 그는 1938년부터 1940년까지 일본육사 55기를 졸업했다.
봉천군관학교는 1939년 ‘신경군관학교’(장춘 소재 만주사관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4년제로 개편되었다.
신경군관학교 2기생(1940년)으로는 박정희 (1917~1979·일본육사 57기 편입)가 입교하게 된다. 정일권과 박정희는 모두 1917년생 동갑이었지만 생일은 박정희가 일주일 빨랐다. 군 경력으로 보면 정일권은 박정희의 봉천군관학교 5년 선배이자 일본 육사 2기 선배였다.
정일권이 현역 중위였을 때 박정희는 사관생도였고, 박정희는 선배 장교였던 정일권의 숙소를 찾아와 배급 술을 얻어 마시곤 했다고 한다. 한국군에서도 정일권은 군사영어학교 1기로, 육사 2기 출신 박정희의 선배였다. 북만주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훗날 5·16 군사정변 이후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관계로 다시 이어지게 된다.
정일권은 1940년(23세) 일본육사를 졸업한 뒤 만주군 소위로 임관돼 길림 부대에 배치되었다. 그의 첫 보직은 교관이었다. 1년 뒤인 1941년에는 신경(장춘)의 만주군 총사령부 고급부관실에 근무했고, 1942년에는 중위로 진급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회고록과 달리 정일권이 헌병 장교로 간도 지역 헌병대장을 역임했다는 주장도 있다. 본인은 매우 억울해하며 군 지원 동기부터 적극 반론을 제기했지만, 훗날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수록되며 상반된 평가를 받게 된다.
정일권은 1943년 말 신경 소재 만주군 육군고등군사학교(육군대학·1년 6개월 과정)에 2기생으로 입교했다. 재학 중이던 1945년 대위로 진급했고, 그해 8·15 해방을 맞았다.
해방 직후 그는 만주 지역 독립운동가 신숙의 지휘 아래 혼란기 교민 보호 활동에 참여했으나,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에 체포되었다. 이후 열차에 감금된 채 시베리아로 이송되던 중 소만 국경 근처에서 탈출해 우여곡절 끝에 평양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 평양에서 만주군 출신 장교였던 그의 입지는 매우 좁았다.

그해 말 그는 남한으로 탈출해 서울에 도착했다. 신중하면서도 정확한 판단력과 결단력을 지녔던 정일권은 1945년 말 미군이 개설한 군사영어학교 1기로 입교한다.
1946년 조선경비대(육군) 제4연대장으로 임관하며 대한민국 국군 창설 멤버가 된다. 1950년에는 육군 소장으로 전군을 지휘하며 6·25전쟁 당시 공산군의 침략을 막아냈고, 1954년에는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이후 군 내부의 알력 속에 전역한 정일권은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터키대사·프랑스대사·미국대사를 지냈고, 재야에서 5·16을 맞게 된다.
만주군 후배였던 박정희 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뒤 군 선배였던 정일권을 다시 미국대사로 임명했다. 박정희는 정일권을 유능한 국가 경영자로 신뢰했던 것이다.
이후 정일권은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외무부 장관, 국무총리, 국회의장을 지내며 대한민국 최고 권력의 핵심 코스를 밟게 된다.

그러나 역동의 한국 현대사는 그에게 꽃길만을 허락하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 친일반민족행위라는 역사적 심판이 그에게 드리워지며, 그의 만주군 경력은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대한민국 국군 창설 멤버로서 “북한 공산 침략을 막아낸 공”과, 그가 강하게 부인했던 “만주군 친일 경력이라는 과”는 결국 시대와 역사가 냉철하게 평가할 몫일 것이다.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난 한 소년이 고향 함경도로 돌아오며 겪어야 했던 처절한 역사 속에서, 우리는 20세기 한반도의 비극과 격동을 함께 목격하게 된다.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이며, 버려야 할 것은 또 무엇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