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categorized

[출판]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 허용되는가…김재형 전 대법관 ‘언론과 인격권’

“서울지방법원 1995년 6월 23일 선고 94카합9230 판결은 이휘소 판결로서, 우리나라 판결에서 최초로 ‘공인’ 또는 ‘공적 인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주심 판사로서 판결문을 썼습니다.”

김재형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말이다. 전 대법관인 그는 판사와 법학자, 대법관,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오랫동안 표현의 자유와 인격권이 충돌하는 현장을 지켜봤다. <언론과 인격권> 제2판은 그가 재판과 연구를 통해 축적해 온 고민을 집약한 책이다.

책의 출발점에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다. 표현의 자유는 개인의 자아실현을 위한 기본권인 동시에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토론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권력에 대한 비판도, 시민의 합리적 선택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명예와 사생활, 초상, 개인정보를 마음대로 침해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언론의 자유가 필요하지만, 인간의 존엄과 인격 역시 포기할 수 없는 기본권이다. 결국 언론과 인격권을 둘러싼 문제는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충돌하는 두 권리를 어떤 기준으로 조화시킬 것인가에 있다.

<언론과 인격권>은 이 복잡한 문제를 추상적인 법 이론에만 머물지 않고 실제 사건과 판례를 통해 살펴본다. 명예훼손, 사생활 침해, 초상권, 개인정보, 인터넷상의 인격권 침해, 언론보도에 대한 반론보도와 금지청구, 손해배상 등 언론 현장에서 끊임없이 부딪히는 쟁점들이 폭넓게 다뤄진다.

저자의 문제의식이 구체적으로 형성된 계기 가운데 하나가 이휘소 박사를 모델로 한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출판금지 가처분 사건이다. 당시 재판부는 역사적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소설에서 창작의 자유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지, 허구적 표현으로 인해 고인과 유족의 인격적 이익이 침해될 수 있는지를 판단해야 했다.

김재형 교수는 판사로서 이 사건의 주심을 맡아 판결문을 작성했다. 그는 재판기록에 첨부된 기사와 책을 읽으며 사실과 허위의 경계, 문학적 상상력의 한계, 표현의 자유와 인격권의 보호 범위를 고민했다고 회고한다. 법적 논리뿐 아니라 사회적 형평감각이 함께 요구되는 사건이었다.

이 판결은 ‘공인’ 또는 ‘공적 인물’이라는 개념을 우리나라 판결에서 처음 사용한 사례다. 이후 공인에 대한 언론보도와 비판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는 한국 언론법과 명예훼손 법리의 중요한 쟁점으로 발전했다.

공인이라고 해서 인격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공적인 업무와 사회적 영향력이 큰 사람은 일반인보다 폭넓은 감시와 비판을 감수해야 한다. 반대로 단순한 호기심이나 사적 영역에 관한 폭로까지 공익적 보도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따라서 누가 공인인지보다 해당 보도가 공적 관심사와 얼마나 관련되는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따지는 일이 중요하다.

제2판에는 초판 이후의 법률과 판례 변화가 반영됐다. 특히 ‘공인보도와 인격권’, ‘초상권’에 관한 내용이 새롭게 추가됐다. 김 교수가 대법관으로 재직하며 참여한 판결들도 책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공인의 정치적 이념에 대한 비판이나 의혹 제기와 관련해 명예훼손 책임을 제한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판단한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다. 공적 인물에 대한 감시와 비판이 위축되지 않도록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다. 저자는 언론법과 인격권법을 연구하며 품었던 문제의식을 실제 판결에 반영했다고 밝힌다.

책은 인격권 침해가 발생했을 때 피해자를 어떻게 구제할 것인지도 상세히 다룬다. 피해 구제는 손해배상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보도금지와 삭제, 정정보도, 반론보도 등 여러 수단이 존재한다. 어떤 구제수단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피해자의 권리 회복과 언론의 자유에 미치는 영향도 달라진다.

언론보도를 사전에 금지하는 조치는 피해를 예방할 수 있지만, 언론의 자유를 지나치게 위축시킬 위험이 있다. 반면 보도 이후의 손해배상만으로는 이미 훼손된 명예와 사생활을 충분히 회복하기 어렵다. 이 책이 인격권 침해에 대한 ‘다양한 구제수단’을 강조하는 이유다.

김 교수는 인격권 보호를 판례와 개별 법률에만 맡겨두어도 되는지 묻는다. 우리 민법은 재산권에 대해서는 세밀한 규정을 두고 있지만, 명예와 사생활, 초상 등 인격적 이익에 대해서는 충분한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그는 민법에 인격권에 관한 포괄적인 규정을 마련할 것을 제안했으며, 이러한 제안은 법무부의 인격권과 퍼블리시티권 관련 민법 개정안에도 반영됐다.

<언론과 인격권>은 언론인을 위한 실무서인 동시에 시민을 위한 기본권 안내서다. 기자와 편집자에게는 무엇을 어떻게 보도할 것인지 판단하는 기준을 제공하고, 법률가에게는 표현의 자유와 인격권을 둘러싼 판례와 이론의 흐름을 보여준다. 또한 누구나 자신의 의견과 일상을 온라인에 공개하는 시대에 살아가는 시민들에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사실이라고 해서 모두 보도해도 되는가. 공인에 대한 의혹은 어느 정도 확인한 뒤 보도해야 하는가. 과거의 잘못을 언제까지 공개할 수 있는가. 인터넷에 한 번 공개된 사진과 개인정보는 영원히 사용해도 되는가. 언론의 자유를 지키면서도 한 사람의 존엄을 훼손하지 않는 길은 무엇인가.

이 책은 이러한 질문에 간단한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구체적인 사건과 판례, 치밀한 법리를 통해 판단의 기준을 세운다. 표현의 자유와 인격권은 어느 한쪽이 이기고 다른 한쪽이 사라져야 하는 관계가 아니다. 두 권리를 함께 지켜내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의 과제다.

<언론과 인격권>은 그 어려운 균형을 평생 재판하고 연구해 온 법률가의 기록이다. 언론의 자유를 넓히되 인간의 존엄을 놓치지 않으려는 김재형 교수의 고민이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흐르고 있다.

▼ 아시아엔 후원계좌 ▼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후원은 아시아엔과 아시아 저널리즘의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됩니다.
우리은행 1005-601-878699 (주식회사 아자미디어앤컬처)

이상기

아시아엔 기자, 전 한국기자협회 회장

필자의 다른 기사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본 광고는 Google 애드센스 광고이며, 본 사이트와는 무관합니다.
Back to top button
AI 에이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