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적 맥락의 공통성-‘퇴각 속의 전환점’
게티스버그 전투(1863)와 지평리 전투(1951)는 모두 연속된 패퇴 끝에 맞이한 전환점이었다. 게티스버그에서 포토맥군은 리 장군의 북상에 밀려 사기와 조직이 흔들렸고, 지평리에서 미 제2사단 23연대전투단(23rd Infantry Regiment Combat Team)은 중공군의 파상공세 속에 고립됐다. 군우리 패퇴 이후 미 2사단은 심대한 피해를 입고 원주·제천 일대에서 재편성 중이었으며, 미 23연대는 중공군 6개 연대에 포위된 채 싸웠다.
존 엔탈은 논문 ‘Chipyong-ni: The Gettysburg of the Korean War'(Military Review, 1989년 3–4월호)에서 “게티스버그가 남북전쟁의 심리적 전환점이었다면, 지평리는 한국전에서 미 육군의 도덕적 부활이었다”고 평가했다. 두 전투는 모두 국민의 신뢰 회복과 군의 명예 회복이라는 정신적 의미를 공유한다.
전략적 의미-‘수세에서 공세로의 전환’
게티스버그 전투 이후 북군은 리의 남하를 저지하며 전략적 주도권을 확보했고, 지평리 전투 이후 유엔군은 춘천–홍천–원주–지평리 방어선을 고수한 뒤 1951년 2월 하순 반격작전으로 공세에 나섰다. 엔탈은 “지평리는 미 제8군이 ‘더 이상 후퇴하지 않는다’는 결의를 행동으로 옮긴 최초의 방어전”이라 분석했다. 그는 또 “게티스버그가 미국 민주주의 군대의 자기 구제(self-redemption)였다면, 지평리는 연합전의 교범화된 실천이었다”고 했다. 게티스버그가 국내적 단결의 상징이었다면, 지평리는 국제적 연합의 신뢰 회복의 상징이었다.
전술적 공통점-‘사주방어의 교과서’
게티스버그에서 미드(Meade) 장군은 ‘내선(內線)의 원칙’에 따라 세메터리 힐–리틀 라운드탑–컬프스 힐을 잇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지평리에서 프리먼 대령은 사방이 포위된 상황에서 360도 원형 방어를 구축하고, 포병 화력과 항공 지원으로 적을 격퇴했다. 당시 포탄이 떨어져 항공 재보급을 받았는데, 일부 보급품은 중공군 진영에 떨어지기도 했다. 양 전투 모두 지형의 이점을 극대화한 ‘내선방어(Defense on Interior Lines)’의 전형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적의 공세를 흡수하고 주도권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게티스버그의 피켓 돌격(Pickett’s Charge)이 북군의 화력에 산산조각 났듯, 지평리의 중공군 야간 돌격도 미군의 105mm·155mm 포병 집중사격과 항공지원으로 격멸됐다. 프랑스군 총지휘관 몽클레르 중령(훗날 예비역 중장)의 사이렌 작전도 큰 역할을 했다.

정신적 가치-‘자유세계의 신뢰 회복’
게티스버그 이후 링컨은 “이 나라의 정부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임을 새롭게 확신케 했다”고 말했다. 그 정신은 1951년 지평리에서도 되살아났다. 프리먼 대령은 “지평리를 지키지 못하면 유엔의 신뢰는 무너진다”고 강조했다. 그는 박격포탄 파편으로 다리를 다쳤으나 전투 종료 후에야 후송됐다. 지평리 사수 명령은 단순한 전투명령이 아니라 자유세계의 신뢰를 지키는 도덕적 임무였다. 엔탈은 “게티스버그의 승리가 미국 내부의 분열을 봉합한 것이라면, 지평리의 승리는 미국 외부 동맹국의 신뢰를 회복시켰다”고 했다. 즉 게티스버그가 국내정신의 통합을 상징했다면, 지평리는 국제적 연대의 복원을 의미했다.
유럽우선주의자들의 위신 회복
한국전 초반의 참패로 유럽우선주의자들(Europe Firsters)은 아시아 개입을 “국가적 수치”로 여겼다. 그러나 지평리 승전은 “미군은 유럽에서도 통할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미국의 정치·군사 엘리트들은 지평리를 계기로 유럽과 아시아 양전선을 균형 있게 바라보기 시작했고, 이는 이후 NATO 강화와 미국의 양면전략(two-theater strategy) 확립으로 이어졌다. 지평리는 미국의 세계 전략을 심리적으로 재정립한 계기였다.
종합 평가-‘게티스버그의 재현, 지평리의 영속’
게티스버그 전투가 민주주의의 이상을 지켜낸 내전의 승리였다면, 지평리 전투는 자유세계의 이상을 지켜낸 국제전의 승리였다. 두 전투는 절망 속에서 일어난 ‘정신적 반전’이었으며, 전략적으로는 퇴각에서 재기, 작전적으로는 수세에서 공세로의 전환점이었다.
존 엔탈의 요약
“At Chipyong-ni, the U.S. Army found its Gettysburg — the place where retreat ended and resolve began.” (지평리는 미 육군의 게티스버그였다. 후퇴가 끝나고 결의가 시작된 곳이었다.) 지평리 전투는 단순한 한국전의 한 장면이 아니라, 미국이 군사적·도덕적 정체성을 회복한 ‘게티스버그의 재현’이었다. 그 승리는 유럽우선주의자들의 위신을 되찾아주었고, 자유세계의 연대를 재구축한 정신적 이정표였다. 만약 지평리에서 크롬베즈 특임대가 포위된 프리먼 연대를 구출하지 못했다면, 미군은 한반도 철수를 고려했을 가능성이 크다. “끝까지 버텨라, 구출부대가 오고 있다!”-이 말은 지평리의 장병들에게 가장 큰 희망이 되었고, 그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6·25 전쟁 중 지평리 전투는 오늘날에도 “미군이 가장 미군답게 싸운 전투”로 평가받으며, 제2차 세계대전의 바스통 전투와 함께 회자된다. 지금도 미군 부대는 주기적으로 지평리를 찾아 선배들의 얼을 기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