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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 변호사가 남긴 말과 장면들…“유머 없는 법은 위험하다”

야당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한승헌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 책 중 가장 많이 팔린 게 ‘산민객담’ 시리즈입니다. 사람들은 진지한 정론보다 펀치라인(punch line), 결정타나 반전(反轉)이 있는 얘기를 선호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어느 날 건강검진 결과가 좋게 나왔습니다. 의사는 “상태가 아주 좋습니다. 이렇게 좀 마르시고 속으로 단단한 분이 장수하십니다”라고 합디다. 좀 골려주고 싶었어요. 모른 척하고 말했습니다. “나는 장수(長水) 출신이 아니고 그 옆 진안(鎭安) 출신이오.”

법정에서, 특히 오랜 세월 변호사로 일하면서 쌓아온 유머도 엄청나다. 유머 같이 말씀하셨지만 유머가 아니라 죽비 같은 것도 많다. “‘인권변호사’라는 말은 가급적 쓰지 마시오. 변호사는 그 자체가 인권변호사요. ‘역전 앞’이나 ‘수영 잘하는 수영선수’처럼 맞지 않는 표현 아닌가.”

한승헌 변호사 검사 시절

그는 검사 시절 첫 패소 사건의 판결문을 받아보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진 게 아니군. 법이 진 거야.” 양심수를 변호할 때는 이렇게 변론했다. “피고인에게 죄가 있다면 양심을 가졌다는 것뿐이다. 어떤 실정법으로 처벌할 것인가.”

후배 검사들을 준엄하게 꾸짖을 때는 칼날 같았다.
“요즘 검사들은 법복 대신 철갑을 입은 듯하다. 국민의 말도, 양심의 말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검사들에게 묻는다. 재판은 진실을 따지는 곳이다. 그런데 왜 진실이 들어가면 죄가 되고, 거짓이 들어가면 증거가 되는가?”
“요즘 법조계는 그만두고 정치권에서도 걸핏하면 ‘법대로 하자’고 하는데, 그렇게 법대로 하자고만 하면 더욱더 검찰 세상이 되고, 법이 아파서 법이 신음하게 된다.”

그는 평생 두 차례 감옥살이를 했지만 투옥 위협은 훨씬 많았고, 구속 때문에 8년 5개월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그가 우리나라 최고의 저작권 이론가가 된 것은 이 기간 중 먹고살기 위해 공부한 덕이었다.

재판정에 들어가는 한승헌 변호사

그의 ‘감옥론’도 매우 유머러스하다. “감옥은 인생의 대학이라고 하는데, 나는 졸업장도 없이 몇 번씩 복학했다.” “감옥에서 자유를 느끼고, 웃을 수 있었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밖보다 안이 더 솔직하고 인간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승헌 변호사 ‘유머론’의 절창(絶唱)은 아마도 이게 아닐까. “법 없는 양심은 감정이고, 양심 없는 법은 폭력이다. 유머 없는 법조인은 위험하다.” “사람들은 정의를 좋아하면서 정의와 함께 살기는 왜 그리 두려워할까.”

한 변호사 님과 고 박현채(朴玄菜, 1934~1995) 교수, 이해동(李海東) 목사, 김중배(金重培)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한겨레신문·MBC 사장), 조화순(趙和順, 인천 도시산업선교회 설립자) 목사 등 8명은 1934년생 개띠 동갑이다. 이들은 철권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 모임을 만들었는데, 이름이 ‘개판회’였다. 아, 어쩌면 그 작명(作名)마저 험난한 시대에 “개판을 쳐버리자”며 철혈 독재정권을 저격하려는 유머가 아니던가.

한 변호사가 개판회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개판회 남녀 성비가 7대1이었지만 조 목사 하나를 당해내지 못했다. 우리가 일찍이 페미니스트였던 셈이다.”

한승헌 변호사는 노무현 정부 때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사개추위) 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제17대 국회 김원기(金元基) 국회의장을 만나고 “원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김 국회의장은 한 변호사의 고교 2년 후배다. 그러나 국회 교육위원회 위원장인 한나라당 황우여(黃祐呂) 의원을 찾아갈 때는 좀 ‘우려’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명패를 보니 ‘우려’가 아니라 ‘우여’였다. 마음이 좀 놓였다. 협조를 당부하고 나오는데, ‘우려’는 없을지 모르지만 ‘우여곡절’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한나라당은 후에 당론을 변경해 ‘사개추위’ 안을 반대함으로써 한변(韓辯)을 힘들게 했다. 그는 이때 한나라당 3역을 방문해 “한나라당이 발목을 잡는다고 해서 저는 손목을 잡으려고 왔다”고 말했다. 협조 여부에 상관없이 한나라당 지도부가 얼마나 뜨끔했을까.

MB 정부 때 생명·평화·환경운동에 앞장서는 스님과 신부들에 대해 모처에서 압력을 가했다. “여자 문제며 이것저것 저희가 조사하고 있습니다.” 한 신부가 발끈했다. “뭐, 그런 일이 있다고 치자. 너희들은 마누라와 날마다 하면서 혹시 여기 계신 분들이 평생 한두 번 한 걸 걸고 넘어지겠다고? 치사한 놈들.” 그러자 거짓말 못하는 한 젊은 시인이 일어섰다. “신부님, 틀린 말은 하시면 안 됩니다. 결혼했다고 날마다 하는 건 아닙니다.” 신부와 스님들이 진지하게 되물었다. “정말?”

현장에 계셨다는 한 변호사는 “협박 분위기는 묻혀버리고 폭소만 남더라”며 “유머는 이런 힘을 발휘한다”고 그의 책에 썼다.

한승헌 변호사는 김대중 대통령의 유머 능력을 평소 높게 평가했다. DJ가 1985년 12월 미국에서 귀국할 때 미국 고위 관료, 정치인, 교수 등이 동행한 데 대해 전두환 정권이 “사대주의적 망발”이라고 맹비난했다. DJ는 이에 대해 “내가 그들을 따라다녔다면 몰라도, 그들이 나를 따라왔는데 왜 내가 사대주의자인가?”라고 말했다. 한변은 이를 촌철살인(寸鐵殺人)이라고 평가했다.

DJ는 한변의 유머 ‘단골 고객’이기도 했다. 행사 때 미리 만나면 “오늘은 뭐 좀 유머 없느냐”고 묻기도 했다. 한 번은 DJ가 “우리 활동자금도 궁하고 하니 누가 수첩 들고 한 변호사 따라다니면서 유머를 받아 적어 출판해서 돈 좀 벌어보자”고 말할 정도였다. 한변은 “대통령 되신 후로도 면전에서 유머를 구사해 즐겁게 해드린 적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그런 한변에게 DJ는 여러 번 전북지사에 나가달라고 요청했다. 면전에서 분명하게 입장을 밝혔는데도 두 차례나 ‘특사’를 보내 설득하려 했다. 그는 첫 번째는 “전북지사보다 애국지사가 되고 싶다”고 답해 돌려보냈다. 두 번째 특사에게는 “전북지사보다는 서울 본사를 더 좋아한다”라고 답했다. DJ보다 한변이 10살 어리지만 두 분은 나이 차를 뛰어넘어 동지이자 친구로 민주화 투쟁을 같이 해왔다. DJ의 모든 사건을 한변은 변론했고, 그의 네 자녀 결혼 때마다 DJ는 친필 휘호를 보내줬다. DJ 손녀 결혼식 주례를 한승헌 변호사가 맡기도 했다.

절대로 공직을 맡지 않으려는 한변에게… “한승헌 변호사 분명히 크리스천이지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빌립보서 알죠. 그러니 감사원장 하세요. 그러면 매일 감사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라는 말로 그를 케이오(KO)시켜 감사원장을 맡게 한 DJ의 유머 감각은 아무리 봐도 멋지다.

산민객담

김기만

바른언론실천연대 대표, 김대중정치학교 대외협력본부장,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노조위원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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