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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민 한승헌 변호사③] 가훈 “자랑스럽게 살진 못해도, 부끄럽게는 살지 말자”

2006년 11월 21일의 출판기념회. 왼쪽부터 이희호 여사, 김대중 전 대통령, 한승헌 변호사, 부인, 박형규 목사

한승헌 변호사 장례식에서 ‘강낭콩’의 민족시인 김준태가 등장해 천정을 뚫을 듯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77년 ‘분단시대의 법정’에서 선생님은 두 쪽으로 깨뜨릴 수 없는 ‘정의(justice)의 금강석’이었다”고 절규했다. 이어 장사익이 등장했다. 이 민족혼의 가수는 선생과의 남다른 인연을 밝혔다. 선생은 당초 2021년 9월 당신의 미수(米壽·88세) 때 당신의 시 가운데 하나를 골라 노래로 만들어 불러달라고 장사익에게 부탁하셨다고 한다. 선생의 시 ‘나의 길’을 부르면서 장사익은 눈시울을 적셨다.

“나는 말없이 / 나는 나의 길을 가련다 / 하늘 끝까지 / 저 하늘 끝까지 / 나는 말없이 / 나의 길을 가련다 / 하늘 높이 깃발 날리며 / 사나운 이 길을 가야겠다 / 하늘 끝까지 / 저 하늘 끝까지.”

한승헌 선생이 당신의 살아갈 길을 예언하는 듯한 노랫말이었다.

이어 ‘한국기독교 민주화운동’ 상임이사인 김영주 목사의 추도사 한 대목에서 모두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1998년 감사원장에 취임한 선생이 어느 날 “주님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잘 안 하고 살았더니 아예 감사원장을 시켜서 밤낮 감사할 수밖에 없도록 했다”는 말씀을 추억할 때였다.

마지막 추도사는 사단법인 ‘평화의 길’ 이사장 명진 스님. 그는 “승적을 박탈당하고 세간을 떠도는 제게 오셔서 냉면 한 그릇 나누시며 힘든 시절에도 웃으며 같이 가자고 하셨던 고마운 어른이셨다”고 추모했다.

유가족을 대표한 차남 규무씨의 인사는 사람들을 숙연하게 했다. “아버님이 1975년 감옥에 가셨다가 8년 만인 1983년 변호사 자격을 회복했지요. 그런데 곧바로 시국사건 변론을 해야 할 상황이 됐습니다. 가족들은 솔직히 이번에는 좀 안 하셨으면 했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아버님이 ‘내가 이걸 변론 안 하면 사람이 아니지’라고 혼잣말하시는 것을 듣고 말았습니다. 아버님은 세상이 말하는 용기, 소신, 강단으로 뭉친 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안타깝고 애틋한 사람을 ‘차마’ 어떻게 외면하는가, 그 ‘차마’라는 단어가 아버님의 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아버님의 ‘명예’는 저희 자녀들에게는 ‘멍에’입니다. 그러나 저희도 안타깝고 애틋한 사람들 껴안으며 부끄럽지 않게 살겠습니다. 아버님이 남겨주신 가훈(家訓)은 ‘자랑스럽게 살진 못해도, 부끄럽게는 살지 말자’입니다.”

감동, 또 감동이었다. 필자도 울었고 여기저기서 곡(哭) 소리가 났다. 호상(護喪)을 맡은 세 분을 대표해 선생의 평생 민주화운동 후배인 장영달 전 민청학련동지회 상임대표가 인사했다. “19일 오전 10시 반에 뵐 때만 해도 눈도 똑바르고 상태가 좋은 편이셨는데, 한방 치료차 내려갔던 고향 땅 전주에서 황망히 가셨다”며 “선생은 많은 사람들의 삶의 지표였고 등대였다”고 회고했다.

한승헌 변호사 검사 시절

한승헌 선생은 언젠가 당신의 삶을 회고하며 “법조인으로는 모진 운명이었다. 검사가 된 1960년에 4·19가 일어났고, 그 1년 후에 5·16이 터졌다. 변호사 전업은 운명이었고, 1965년 남정현 작가의 ‘분지(糞地)’ 필화사건 첫 변론도 운명이었다”고 하셨다.

“변호사로서 가장 가슴 아팠던 사건은 1974년 인혁당(人革黨) 사건이고, 그 주역 여정남이었다”고 말씀하셨다. 사형 선고 다음 날 새벽의 집단 사형 집행이라니….

그는 여성들 앞에서 강연할 때면 “저는 항상 ‘친여 세력’입니다. 여성을 좋아하는 ‘친여(親女) 세력’” 이런 말로 분위기를 풀어주시던 다정다감한 선생. 필자는 1981년 동아일보 기자이자 전주고 19년 후배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처음 뵌 후 41년을 함께한 선생은 지식, 지혜, 인품, 겸손함에다 비견할 수 없는 유머·해학 감각을 지닌 보기 드문 ‘완전체형 지식인’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선두의 사람, 즉 앞장서 일을 꾸미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그 대열의 중간에서나마 이탈하지 않고 꾸준히 따라다닌 사람이다”라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셨다.

아, 한승헌 선생. 참 스승이 드문 시대에 사회생활 60여 년이 온통 삶의 귀감(龜鑑)이셨다. ‘선한 영향력’에서 아마도 당대의 최고가 아니셨을까. 이러니 우리는 그저 “오오메, 기죽어!” 평생 몸무게가 55kg을 넘은 적이 없었지만, 선생은 한 시대의 거인(巨人) 중의 거인이었다.

선생 별세 하루 뒤였던 4월 21일 오전 ‘산민(山民) 한승헌(韓勝憲) 선생님 별세에 곡(哭)함’이라는 긴 글을 썼다. 선생님에 대해 아는 것은 다 썼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추도식을 보고 나니 글이 천의무봉(天衣無縫)처럼 또 나온다. 왜일까. 선생 자신이 용지불갈(用之不渴)의 무한한 ‘인간 보고(寶庫)’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선생의 발인은 2022년 4월 25일 오전 6시 50분, 강남성모병원에서 있었다. 특히 1989년 방북(訪北)으로 재판을 받았던 임수경 전 노무현재단 상임운영위원(19대 국회의원)과 1971년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사건으로 엮여 지독한 고문을 당하고 분신을 시도했던 서승 우석대 석좌교수가 보여 반가웠다. 한 선생은 고향 전북 땅, 특히 번민 많았을 1950년대 후반의 20대 문학청년을 번민과 희망으로 휘감았을 모교 전북대에서 노제(路祭)를 맞았다.

오후 2시부터 시작된 노제에서는 김승수 전주시장(당시)이 추모사를 했다. 고인의 전북대 후배이기도 한 그는 “존재만으로도 제 삶을 일으켜 세워주셨고, 흔들릴 때마다 가차 없는 시선으로 정도(正道)를 알려주셨다”며 “아무리 각박하고 힘들어도 웃음이 들어갈 마음 한 구석을 비워두라던 말씀을 기억하겠다”고 추모했다.

전북 정읍이 고향인 국창 왕기석이 추모곡을 부른 데 이어, 전북 임실이 고향인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추모시가 사람들을 울렸다. “당신의 한 생애는 역사였고, 혁명이었으며, 실패였고, 좌절이었고, 희망이자 용기였고, 완수였다. 흙바람 이는 3월이었고, 4월의 바람이었으며, 5월의 아침이었고, 6월의 거리였으며, 촛불을 든 해가 질 무렵이었고, 시를 쓰는 나무들의 노을이었으며, 그리고 사랑이었으며, 당신이기도 한 저 일련의 햇살들을 아직도 우린 어쩌지 못한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하관식은 묵념, 조사(弔辭), 하관, 복토, 하관 예배 순서로 진행되었다. 김용채 변호사의 조사. “선생은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여러 인사와 정의 실현을 사명으로 하는 변호사들의 사표이자 스승이었다.”

진중함과 해학을 동시에 지닌 시대의 선비 한승헌. 서울 양광교회(녹번동) 권사인 한 변호사님은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 2묘역 1-148에서 영면에 들어갔다. 1958년에 결혼했으니 금혼(金婚), 회혼(回婚)을 넘어 66년을 해로하신 김송자 여사님과 규면·규무·경미·규훈 네 자녀가 있다.

2025년 9월 30일 ‘산민포럼’ 발족식이 있었고 또 다른 낭보(朗報)가 있다. 11월 11일 선생의 모교인 전북대학교에 ‘한승헌 도서관’이 들어섰다. 한 선생은 정치학과 졸업생이지만 법학대학과 법학전문대학원에 큰 관심을 보여주셨다. 차제에 선생의 유품과 저서, 각종 기록, 그리고 선생의 삶을 담은 영상을 비치해 전시하고, 선생 관련 여러 행사를 통해 선생을 기억하고 정신을 나누는 또 하나의 사회적 광장을 만들어 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개인 이름을 딴 도서관으로는 연세대가 운영하는 ‘김대중 도서관’(서울 마포구 동교동)이 유명하지만, 아름다운 한옥 건물인 ‘한승헌 도서관’(전북 전주시 덕진구)도 학생과 시민들에게 매우 유익하고 역사적인 공간이 되리라 생각한다.

한승헌도서관

이와 함께 선생의 고향인 전북 진안에 이미 ‘산민 한승헌 기념회’가 있다. 한 변호사와 동향인 전북일보사 윤석정 사장(82)이 회장을 맡고 있는 이 단체는 이미 선생의 1~3주기 추모식을 진행했다. 한 선생은 고향 진안군 안천면민들의 요청에 따라 ‘우국여가(憂國如家·나라 걱정을 집 걱정하듯 하라)’라는 글씨를 써 족자를 만들어 안천면민의 날에 직접 가서 기증했다. 이 액자는 지금도 안천면사무소에 걸려 있다.

마지막 가화(佳話) 하나. 이날 발족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 주최 측의 선물이 주어졌다. 고춧가루 한 봉지와 책 한 권. 지난 1994년 ‘구국전우 사건’ 때 한 선생이 변호를 맡아준 데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정화려 씨가 충북 단양에서 직접 생산한 고춧가루 100여 봉지를 들고 와 나누었다. 또 한 선생이 ‘사개추위’ 위원장으로 일할 때 함께했던 김인회 감사원 감사위원은 자신이 쓴 책 <한승헌 변호사의 삶, 균형과 품격>을 한 권씩 증정했다. 그는 이 책과 한 선생 추억담을 통해 “선생은 음지와 양지를 오간 균형 있는 삶을 살았다”며 “변화와 투쟁, 세속과 탈속, 엄격과 유머, 전통과 혁신, 민족과 세계, 자부심과 겸손, 일관성과 다양성 등 하나하나 중요한 가치를 경험하고 실현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산민객담

선생은 유머조차 윤리가 있었다. 깨끗했다. 남을 비방하거나 조금이라도 공격하는 투의 유머는 아예 없었다. 한 법조인을 추념하고 그의 정신과 철학, 삶을 다시 비추며 그를 닮고 배우기 위해 포럼을 띄우는 자리는 왠지 낭만의 분위기까지 풍겼다. 때로는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겠지만 인내의 삶을 산 그를 ‘정의와 양심을 지켜온 의인(義人)’이라 부르는 데 이견은 별로 없을 듯하다.

최종고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 선생의 삶을 “법(法)과 문(文)의 두 수레를 끄는 역마차와 같은 인생”이라고 했다. 훌륭하고 멋진 표현이라는 생각이다. 선생 같은 스승, 사표, 멘토가 있어 존경하고 의지하며 롤 모델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산민포럼의 공동위원장은 장영달 전 국회 국방위원장, 서창훈 전북대 이사장, 양오봉 전북대 총장 3인이 맡기로 했다.

김기만

바른언론실천연대 대표, 김대중정치학교 대외협력본부장,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노조위원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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