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가 2016년 일주일간 체류한 베네수엘라 현장은 차베스의 사회주의 실험과 마두로 정권의 현실을 동시에 보여준다. 차베스는 권력 개혁과 빈곤 해소를 일부 달성했으나 부정부패와 경제 취약성을 남겼고, 마두로는 이를 계승하지 못하며 국가 경제와 통치 기반을 붕괴시켰다. 현지 시민들은 화폐 가치 하락, 물자 부족, 안전 위협 속에서 생존을 이어갔다. 포퓰리즘과 석유 의존은 자립 구조를 약화시켰고, 이번 사례는 국제 개입과 정치적 나눔의 한계, 자립 기반 구축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한다. <편집자>
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단상
최근 도널드 트럼프 정권이 니콜라스 마두로 체포 문제를 둘러싸고 강경한 태도를 보이면서, 베네수엘라 사태에 대한 평가는 다시 극단적으로 갈리고 있다. 한쪽에서는 “독재자의 종말”이라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제국주의적 내정 간섭”이라 규탄한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단순히 좌·우 진영 논리로만 바라보는 것은, 베네수엘라 민중이 실제로 겪어온 삶의 결을 놓치게 만든다.
꼭 10년 전인 2016년 1월, 일주일 남짓 베네수엘라에 머문 적이 있다. 짧은 체류였지만 그곳에서 본 풍경은 이념의 언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 썼던 소감을 다시 소환해, 이번 사태를 바라보며 몇 가지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철망의 나라에서 묻다 (2016년 방문 메모에서)
베네수엘라는 나의 이번 여정에서 중요한 방문지였다. 차베스의 실험 현장을 직접 볼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차베스에 대한 평가는 양극단으로 갈린다. 독재자와 혁명가, 성공과 실패. 그와 그의 실험에 관한 총체적 평가는 뒤로 미루고, 이번 방문에서 내게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를 넘어>의 저자인 마헤슈와난다 다다지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고, 협동조합 등 현장을 직접 방문하는 일이었다.
마헤슈와난다 다다지는 자본주의 붕괴 이후의 대안 사회이론인 프라우트(PROUT) 사상 연구소 소장으로, 차베스 경제정책을 자문해온 인물이었다. 그를 통해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눈앞에서 쿠바의 카스트로와 연대하며 새로운 사회주의 건설을 기치로 중남미를 이끌고자 했던 차베스의 실험,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마두로 정권의 실태를 보다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와의 인연은 그의 책 <자본주의를 넘어>가 2015년 한살림출판사에서 칫다다지의 번역으로 출간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한국에 와 한살림 생협 등을 중심으로 순회 강연을 했고, 그 과정에서 숲마루재에도 하루 머문 적이 있다. 마침 함께 공부하던 도반들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 책은 그 뒤에 우리 공부모임의 교재로 함께 읽은 적이 있다.
자본주의의 필요성이나 호불호를 떠나, 이 체제가 이대로 지속될 수 없다는 데에는 많은 이들이 공감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이후, 혹은 그것을 넘어서는 사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이는 매우 중요하고도 시급한 질문이다. 수행·봉사 단체인 아난다마르가에서는 자본주의를 넘어선 사회에 대한 이론으로 프라우트 사회경제이론을 제시하고 있으며, 나 역시 이 이론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이번 베네수엘라 방문의 계기이기도 했다.
2016년 1월의 베네수엘라는 나의 여정 가운데 가장 무거운 질문을 안겨준 땅이었다. 이곳은 단순한 방문지가 아니라, 차베스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혁명의 실험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우고 차베스. 그를 두고 세상은 여전히 갈라진다. 독재자냐 혁명가냐, 성공이냐 실패냐. 그러나 이 질문은 공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곳에서 혁명은 더 이상 구호가 아니었고, 사람들의 하루를 감싸고 있는 공기이자 긴장이었으며, 불안과 체념 그 자체였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 택시 요금을 치르며 지폐 다발을 건넸다. 100볼리바르 짜리 지폐가 묶음으로 오가고, 그 위에 다시 절반이 넘는 돈뭉치를 얹어야 했다. 화폐로 불쏘시개를 삼는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스쳤다. 시내버스를 탔다. 버스 요금은 20볼리바르(약 360원), 지하철은 왕복 티켓인데 5볼리바르, 30원이 채 안된다.
가솔린은 1리터에 0.9볼리바르, 달러로는 2센트에 불과해 사실상 무상에 가까웠다. 반면 피자 한 판은 1,000볼리바르, 보통 식당의 한 끼 식사는 1,000볼리바르로 하루 임금을 훌쩍 넘었다. 공산품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절대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은 차가 없으니 석유가 아무리 싸도 쓸 데가 없었다. 연이은 인플레이션으로 돈은 거의 가치가 없어졌다. 거리는 적막했고 사람들의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 큰 건물들은 비어 있는 듯 보였다. 활력을 잃은 도시, 마치 생명의 움직임이 정지된 공간 같았다. 돈은 있었지만, 그 돈이 지탱해야 할 삶의 질서와 신뢰는 이미 무너져 있었다.

철망으로 닫힌 도시와 텅 빈 진열대
도시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철망이었다. 이미 이 나라를 떠날 수 있었던 이들은 거의 떠난 뒤였고, 남아 있는 집과 건물들은 하나같이 철창으로 자신을 감싸고 있었다. 그것도 한 겹이 아니라 두 겹, 세 겹으로. 대문에 철망, 현관에 다시 철문, 창문에는 촘촘한 쇠창살, 그 안쪽 침실 방문 앞에도 철망이 처져 있는 집들. 도시 전체가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듯했다. 치안이 무너진 사회에서 사람들은 국가가 아니라 철망에 의지해 잠을 자고 있었다.
큰 도로와 주요 건물 앞에는 무장한 경찰과 경비병들이 서 있었지만, 그 뒤편은 사실상 무법지대였다. 혼자서는 시내에 나갈 수 없었고, 함께 나갈 때조차 거리에서는 스마트폰을 꺼내지 말고 공공장소에서는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당부를 들었다.
아침이 되면 국영 마트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다. 차베스 시절 ‘민중의 식량 주권’을 상징하던 국영 마트 앞에, 말없이 묵묵히 서 있는 사람들의 줄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면 진열대는 대부분 비어 있었다. 설탕도, 밀가루도, 식용유도 없었다. 가끔 물건이 들어오는 날이면 사람들은 새벽부터 줄을 섰지만, 자기 차례가 오기 전에 바닥나는 일이 다반사였다. 차베스 시절 거의 무상 배급에 가깝게 생필품을 구매하던 공간은 이제 텅 빈 진열대 앞의 긴 줄로만 이어지고 있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돈은 이미 가치가 없었다. 문제는 물건 자체가 없다는 것이었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국가의 능력이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차베스의 약속
차베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세 가지를 약속했다. 오래 지속되던 권력 구조를 깨겠다는 것, 가난을 물리치겠다는 것, 부정부패를 없애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첫 두 가지를 해냈다. 가난한 이들의 정당이 집권했고,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대규모 주택 공급을 통해 절대빈곤은 분명 줄어들었다.
그러나 부정부패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실패는 곧 경제 기반 전체의 붕괴로 이어졌다.
차베스 이후 그를 계승하겠다고 나선 이는 니콜라스 마두로였다. 그는 차베스의 혁명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했지만, 현장에서 느껴진 것은 ‘계승’이라기보다 정체와 무력감이었다. 차베스의 포퓰리즘은 위험했지만, 오랜 기득권 중심의 권력·금력 카르텔을 무너뜨리고 석유 수출의 혜택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에게는 민중을 설득하는 언어와 기존 질서를 흔드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마두로에게서는 그런 힘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차베스의 경제정책에 대한 프라우트 연구소의 평가는 분명했다. 차베스의 경제정책은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그 원인은 포퓰리즘을 통해 국민을 의존형으로 만든 점, 관료와 기득권 세력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청산하지 못한 점, 사회주의 정책에 대한 이해 부족 속에서 공산주의적 정책을 무리하게 강행한 점 등에 있었다.
한때 20만 개에 이르던 협동조합은 집권 기간 동안 오히려 5만 개로 줄어들었고, 이후 중국식 사회적 기업 형태로 전환했으나 이 역시 실패했다. 현지에서 유기농 체험농장을 운영하던 책임자 역시 차베스의 과오로 사회주의 정책에 대한 무지, 포퓰리즘에 빠져 중산층을 고려하지 못한 점, 민중의 자립 의지를 키우기 위한 교육과 문화적 노력의 부재, 그리고 주변의 부패를 정리하지 못한 점을 들었다.
차베스에 비해 카리스마도 부족하고 능력에 대한 평가도 박했던 마두로는, 무너진 균형 위에서 아무것도 새로 세우지 못한 채 과거의 정책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국제 유가의 폭락, 쿠바의 쇠퇴, 미국의 제재가 겹치면서 국가 경제 기반은 급속히 붕괴했고 통치 기반 역시 와해됐다.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권력의 강화, 의회의 장악, 사법부의 종속, 언론 통제, 야당과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뿐이었다.
그 결과 한때 중남미에서 가장 부유했던 국가, 세계 최대의 산유국이자 카리브 해안의 아름다운 관광지였던 나라는 탈출을 위해 사람들이 앞다투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석유의 재앙과 포퓰리즘
이곳에서 포퓰리즘의 실패는 이론이 아니라 몸으로 느껴지는 경험이었다. 사람들은 국가가 나눠주던 삶에 익숙해졌고, 스스로 만들고 책임지는 구조는 자라나지 못했다. 생산은 멈췄고 유통은 붕괴됐으며, 사람들은 줄에 서는 법만 익혔다.
현지에서는 “석유가 국민을 타락시켰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막대한 석유 수익을 자립 체계 구축이나 기간 산업에 투자하지 않고,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 한 결과였다. 석유 수익으로 해외에서 대부분을 수입하는 나라, 농사를 지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농촌, 제대로 된 관개 시설조차 없는 넓은 땅. 석유와 시혜적 정책에 기대어 국민 다수가 자립의 필요성을 잃어버린 것이 가장 큰 불행처럼 느껴졌다.
차베스 시절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마두로 정권에 이르러 더 깊고 더 넓게 퍼져 있었다. 석유는 이 나라를 살릴 수 있는 자원이었지만, 결국 국민을 의존에 길들인 독이 되고 말았다. 전등 없는 밤, 머물던 방에는 불이 들어오지 않았고 화장실에는 휴지도 비누도 없었다. 연구소와 연계된 명상센터로 갈 때는 쌀자루를 챙겨가야 했다. 마트에서 쌀을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박한 삶의 문제가 아니라, 삶 자체가 멈춘 상태였다. 긴 줄과 빈 진열대, 삼중의 철망과 탈출 행렬은 그 결과였다.
민중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배신에 대하여
베네수엘라와 그 뒤의 쿠바를 다녀온 뒤, 내게 남은 것은 깊은 허탈감과 분노였다. 이 두 나라를 방문하기 전, 나는 다른 어떤 나라를 갈 때보다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차베스 정권과 협동조합적 사회주의를 성공 사례로 소개하는 담론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협동조합 운동에 깊이 관여해 온 나로서는 그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농민운동을 하며 1970년 대 중반에 우리 지역에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는 일에 참여했고, 이후 한살림운동과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을 통해 생협 운영과 확산의 현장을 오래 지켜보았다. 그런 경험과 문제의식으로 찾은 현장에서 내가 마주한 것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 그리고 민중의 이름으로 포장된 체제의 붕괴였다.
그 체험은 내가 한때 꿈꾸고 지향해 왔던 것들이 얼마나 쉽게 관념으로 전락할 수 있는지를 통절하게 일깨워 주었다. 동시에 민중을 위한다는 이름으로 민중을 배신한 권력, 그리고 그것을 정파적 이해 속에서 미화하고 소비하는 태도에 대해 깊은 문제의식을 갖게 만들었다.
트럼프의 베네수엘라 개입에 대해
나는 트럼프의 베네수엘라 개입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명백한 주권 침해이자 국제 질서를 훼손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내가 직접 보고 경험한 차베스와 마두로 정권의 독재와 국가 파산, 민중에 대한 배신 역시 지지할 수 없다.
이번 사태를 진영 논리로만 바라보는 시선에 문제를 제기하고자, 나는 이 오래된 기억을 다시 꺼내 들었다. 이번 개입은 독재자나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중 대립과 세계 권력 재편 과정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 사태는 새로운 패권 경쟁의 일부이자, 현존 문명 질서의 균열을 드러내는 징후처럼 느껴진다. 다만 이 기억, 그 체험을 통해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정치는 나눠주는 것으로 시작할 수는 있어도, 자립의 토대를 만들지 못하면 결국 국민을 배신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베네수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불평등과 양극화 속에서 우리 사회 또한 같은 질문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가 더 많이 나눠주느냐의 경쟁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일 것이다.
차베스 정권의 협동조합적 사회주의 이론을 제시하고 정책 자문을 했던 프라우트 연구소 소장 마헤슈와난다 다다지는, 마두로 정권의 경제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미제국주의의 간첩으로 몰려 투옥됐다. 우리가 베네수엘라를 떠난 직후의 일이었다. 그로 인해 다음 해(2017년) 원불교 100주년 기념 국제심포지엄에서 같은 세션의 발표자로 만나기로 했던 약속도 지킬 수 없었다. 정책 비판이 곧바로 투옥으로 이어지는 현실은, 이 체제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