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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기자협회 창립 20주년] 인도네시아 ‘민주개혁의 산물 부패근절위원회·직선제 대통령’

아시아기자협회(Asia Journalist Association, 이하 아자)는 2004년 11월 창립된 국제언론인 단체로, “한 줄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피와 땀을 아끼지 않는다”는 모토 아래 공정보도·언론자유 수호·저널리즘 발전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자는 창립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협회 20주년 주요사와 동남아시아 및 중앙아시아 권역 협업 콘텐츠인 회원국 20년 주요사를 소개합니다. 아자 언론인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창간한 온라인 매체 아시아엔은 2025년 4월 15일부터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10회에 걸쳐 아자 창립 20주년 특집기사를 보도합니다. – 편집자

아자 동남아시아 권역 기고자: 노릴라 다우드(말레이시아), 소팔 차이(캄보디아), 압둘 마난(인도네시아), 엘리샤 에비노라(인도네시아)

압둘 마난은 템포 매거진의 과학 및 환경 부문 편집장을 맡고 있으며, 인도네시아 독립언론인 연합(AJI)의 자문 및 입법위원회 의장도 겸하고 있다.
[아시아엔=압둘 마난 인도네시아 템포 매거진 편집장, 엘리타 에비노라 인도네시아 디에디터 편집장] 수하르토 정권(1966~1998)은 인도네시아에 부패라는 어두운 유산을 남겼다. 장기간 권력을 독점해온 수하르토와 그의 수하들이 그 중심에 서 있었다.

1998년 5월 21일 학생들이 주도한 대규모 시위 끝에 수하르토가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그 직후 국가최고기관인 국민협의회(MPR)는 제11호 결의안을 채택, “후임자는 인도네시아의 만성적인 부패를 해결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수하르토가 몰락하며 개혁의 바람이 불었고 민주주의, 지방분권, 공직자의 책무라는 의제가 떠올랐다. 이에 따라 인도네시아는 1999년 제정된 부패행위 근절법(제31호)을 제정했고, 2002년 12월 독립기관인 부패근절위원회(KPK)를 출범시켰다. 이는 인도네시아가 그만큼 치열하게 부패와 맞섰다는 것을 보여줬지만, 당시의 경찰과 검찰, 사법기관이 부패에 무기력했다는 것을 방증하기도 했다.

개혁은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 체제를 비롯한 사회 각 분야의 중대한 진전을 불러왔다. 그럼에도 부패 등의 여러 악습은 여전히 존재했으며, 대통령과 극소수의 권력층을 넘어 공권력 전반으로 퍼져갔다.

막 출범한 부패근절위원회는 분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법조인, 정치인, 고위공직자 등을 상대로 함정수사를 실시했고, 장관 6명, 경찰고위직 1명, 국회 및 지방의회 의원 274명을 부패혐의로 기소했다.  

부패근절위원회의 성역없는 수사, 고위층 반발 불러와

부패근절위원회의 파격적인 행보는 인도네시아가 고질병을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줬다. 실제로 인도네시아는 2019년 국제투명성기구가 조사한 부패인식지수(CPI)에서 40점을 기록하며 180개국 중 85위를 차지했다.

물론 모든 이들이 부패근절위원회를 반긴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위원회 활동을 약화시키거나 조직 자체를 무력화시키려는 시도까지 있었다. 전임 대통령인 조코 위도도(이하 조코위) 내각의 일부 장관들이 “부패근절위원회가 공직자들을 잡아가면서 국가개발과 투자환경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 적도 있다.

2012년 부패근절위원회가 조코 수실로 교통경찰청장을 체포하고 2015년 부디 구나완 경찰총감을 부패 혐의 피의자로 지목하자 인도네시아 경찰은 부패근절위원회 위원들을 형사고발하며 맞섰다.

부디 구나완이 사퇴하면서 갈등이 일단락됐지만 그는 훗날 조코위 정부에서 국가정보국 국장을 역임했고, 현 프라보워 수비안토 정부에서는 정치법률안보조정 장관으로 임명됐다.

2019년 9월 30일 인도네시아 대학생들이 부패근절위원회 개정안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EPA/연합뉴스>

부패근절위원회가 이처럼 거친 풍파를 맞고 있었지만 국민과 시민단체는 변함없는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2019년 9월 인도네시아 정부와 국회가 관련 법을 개정하며 부패근절위원회는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됐다. 수많은 시민들이 국회 앞에서 시위를 벌였지만 정부와 국회가 법률 개정을 강행했다.

그 결과 부패근절위원회는 독립기관이 아닌 정부 산하기관으로 이관돼 외부의 개입에 취약해졌다. 또한 정부와 국회는 부패근절위원회가 부패수사가 아닌 예방활동에 집중할 것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 부패근절위원회는 성역 없는 수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조코위 대통령의 두번째 임기(2019~2024)는 독립기관인 부패근절위원회의 종말을 의미하기도 했다. 한때 부패세력이 가장 두려워했던 존재였지만 어느덧 반대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정치도구로 몰락했다. 2024년 인도네시아의 부패인식지수는 34점으로 폭락했고 순위도 180개중 115위까지 떨어졌다.

직접선거 낯설었던 인도네시아, 국민 손으로 대통령 선출하다

엘리타 에비노라 인도네시아 디에디터 편집장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택해 투표하는 직접선거는 인도네시아 국민들에게 다소 낯선 제도였다. 2004년 이전까진 국민협의회를 통해 대통령과 부통령이 선출됐기 때문이다. 협의회는 또한 헌법 제정 및 개정, 국가의 정책방향까지 설정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2004년 9월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스스로의 의지로 수실로 방방 유도요노 대통령과 무하마드 유수프 칼라 부통령을 뽑았다. 1955년 이후 국민이 지도자를 직접 선출한 최초의 사례였다.

직접선거 제도는 1998년부터 2004년까지 이뤄진 개혁의 산물이다. 1997년 인도네시아 금융위기가 촉발되면서 국민들의 분노가 커져갔고, 이듬해 인도네시아 전역의 대학생들도 당시 대통령이던 수하르토의 퇴진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국민의 신뢰를 잃은 수하르토가 하야하면서 인도네시아는 ‘개혁기’라 불리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32년간 지속된 수하르토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인도네시아도 새로운 지도자를 배출했다. BJ 하비비, 압두라만 와힛(구스 두르),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그러나 어딘가 부족해 보였다. 이들은 국민협의회가 선택한 과도기의 대통령들이었다.

2001년 인도네시아 헌법 6A조 1항이 “국민은 대통령과 부통령을 직접 선출한다”고 개정되면서 직접선거가 명문화됐고, 2003년 당시 대통령이던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역시 대통령·부통령 선거에 관한 제23호 법률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대통령·부통령 후보 한 쌍(러닝메이트)이 정당 또는 정당 연합의 공천을 받아 출마할 수 있으며, 이들이 총 유효표의 50% 이상의 득표율을 획득하고 또 인도네시아 전체 주(州)의 절반 이상에서 20% 이상의 득표율을 획득해야 당선된다는 법률이 제정됐다.

2004년 대통령 선거는 그야말로 치열했다. 다섯쌍의 러닝메이트가 입후보했고, 재투표까지 가는 치열한 경쟁 끝에 수실로 방방 유도요노와 무하마드 유수프 칼라 팀이 당선의 영예를 누렸다. 수실로 방방 유도요노는 재선에 성공하며 10년 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그 즈음 인도네시아 정치권엔 조코위 전 대통령과 프라보워 수비안토 현 대통령 등 그 다음 세대를 주름잡을 정치인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중 프라보워 수비안토는 등장부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독재자 수하르토의 사위로 수하르토 정권 말기에 육군 사령관까지 맡았던 이력이 있었다.

수하르토가 몰락하면서 프라보워 또한 퇴역했는데 이는 장인 수하르토의 의중이 담겼던 것으로 보인다. 프라보워 수비안토는 1983년 수하르토의 딸과 결혼했지만 1998년 5월 이혼했는데, 수하르토가 후임인 하비비 대통령에게 사위를 해임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1998년 격동의 인도네시아 정계에선 프라보워가 수하르토를 배신했기 때문에 이혼했다는 풍문까지 돌았었다.

프라보워 수비안토의 첫번째 대권 도전은 2004년 골카르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이었다. 그는 당시 군 출신 선배인 위란토 장군에게 패하며 첫번째 고배를 마셨다. 2009년에는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출마하며 1인자가 아닌 2인자로 도전했으나 본선에서 2위로 낙선했다. 2014년에는 다시 대통령 후보로 나서 하타 라자사와 함꼐 출마했으나 조코위- 유수프 칼라 조에 막혔다. 2019년 네번째 도전에선 사업가 산디아가 우노와 손잡고 조코위-마루프 아민과 맞붙었지만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또다시 조코위의 손을 들어줬다.

2024년 10월 20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대통령 취임식에서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통령(왼쪽)과 조코위 전 대통령 <사진=AP/연합뉴스>

4전5기 프라보워, 정적의 아들과 손잡고 최후의 승자로

그러나 두번째 임기를 맞이한 조코위는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프라보워 수비안토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하는 파격인사를 단행했다. 그리고 2024년, 프라보워 수비안토는 조코 위도도의 아들인 기브란 라카부밍 라카를 부통령 후보로 내세워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됐다. 네 번의 실패 끝에 맞이한 승리였다. 한때 정적이었던 조코위의 정치적인 판단이 그의 승리에 큰 지분을 차지했다.

조코위의 이런 결단도 하루 아침에 나온 것은 아니다. 과거 조코위는 중부 자바의 솔로 시장으로 정치경력을 시작했다. 그러나 시장에 오른 지 2년 반만에 자카르타 주지사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는데 당시 그는 민주항쟁당(PDIP)의 요청에 따라 선거에 나섰다고 밝혔다.

여기서 조코위는 또 한번의 모험을 감행했다. 불과 2년만에 자카르타 주지사를 사임하며 2014년 대권에 도전한 것이다. 조코위는 전국적인 인기와 정치력 덕분에 인도네시아 대선에서 두 번 연속 승리했다. 그러나 임기가 끝나자마자 민주항쟁당과 결별했고, 현재 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는 그의 아들과 가족들도 당과의 인연을 끊었다.

조코위와 민주항쟁당의 불화설은 그가 자카르타 주지사이던 시절부터 줄곧 제기돼 왔다. 프라보워 수비안토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오랜 세월을 기다려왔듯, 조코위도 민주항쟁당과의 결별을 오랜 세월을 기다려왔을 수 있다. 조코위가 라이벌이자 야권 대선주자인 프라보워에게 손을 내민 것 또한 일시적이고 충동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란 이야기다. 이들의 정략적인 판단이 교차해 프라보워 수비안토 인도네시아 8대 대통령이 탄생할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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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둘 마난 (Abdul Manan)

인도네시아 템포 매거진 에디터, 인도네시아 독립기자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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