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디세우스가 저승으로 내려간 것은 죽음을 알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살아 돌아가기 위해 죽은 자들에게 앞으로의 길을 물으러 갔다. 키르케의 조언에 따라 그는 세상의 끝에 가까운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제물을 바치자 어둠 속에 있던 망자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영화에서는 흙 묻은 얼굴에 투구를 쓴 영혼들이 피가 담긴 제단으로 다가와 잠시 생명을 되찾은 듯 말을 건네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 장면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다. 호메로스는 죽은 자들이 침묵 속에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에게 여전히 말을 건네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저승의 문을 연 첫 번째 목소리였다. 위대한 왕도, 가장 강한 전사도 아니었다.
가장 먼저 말을 건 사람: 엘페노르
엘페노르는 오디세우스의 부하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영웅이 아니었다. 전쟁의 승리를 결정한 장군도 아니었고, 시인의 노래 속에서 기억될 이름도 아니었다. 그는 키르케의 섬에서 술에 취해 지붕에서 떨어져 죽은 평범한 동료였다. 그가 오디세우스에게 부탁한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잊지 말아 달라는 것.
호메로스는 왜 가장 먼저 그를 등장시켰을까. 아마도 인간의 역사는 영웅의 이름으로 기록되지만, 인간의 마음은 이름 없는 사람을 통해 시험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우리가 가장 오래 기억하는 것은 승리한 장군의 이름만이 아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은 한 사람의 얼굴이다.
왕도 죽음 앞에서는 한 인간이다: 아가멤논
그 다음 나타나는 사람은 아가멤논이었다. 그는 트로이 전쟁 때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다. 살아 있을 때 그는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저승에서 그는 왕의 모습이 아니라 상처 입은 인간으로 나타난다.
그는 오디세우스에게 귀환의 위험을 경고한다. 전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집으로 돌아온 뒤 인간으로 살아가는 일이라고. 승리한 왕도 가정에서는 비극의 희생자가 될 수 있었다. 아가멤논의 이야기는 묻는다. “인간은 무엇을 정복해야 하는가?” 적군인가, 아니면 자신의 운명인가.
가장 위대한 영웅의 후회: 아킬레우스
그리고 마침내 아킬레우스가 나타난다. 우리가 기다렸던 영웅이다. 그러나 호메로스는 독자가 기대한 말을 하지 않게 한다. 살아 있을 때 아킬레우스는 명예를 위해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나 저승에서 그는 말한다. 영광스러운 죽음보다 차라리 살아 있는 자의 가장 낮은 자리라도 낫다고. 이 장면은 고대 영웅주의에 대한 놀라운 성찰이다.
호메로스는 가장 위대한 영웅의 입을 통해 묻는다. 명예로운 죽음보다 살아 있는 인간의 존엄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닌가. 수천 년 뒤 한국 속담의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는 말과 만나는 지점이다. 시대와 문화는 달라도, 죽음을 마주한 인간의 마음은 닮아 있다.
미래를 말하는 죽은 자: 티레시아스
마지막으로 티레시아스가 등장한다. 그는 단순히 죽은 예언자가 아니다. 오디세우스에게 앞으로의 길을 알려주는 안내자다. 여기서 호메로스의 깊은 통찰이 드러난다.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듣는 이유는 과거에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시 살아가기 위해서다.
인간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때때로 이미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흙 묻은 얼굴과 황금 가면
작년에 그리스에서 미케네의 황금 가면을 보았다. 하인리히 슐리만은 그것을 “아가멤논의 얼굴”이라고 믿었다. 황금으로 만든 왕의 얼굴. 그러나 『오디세이아』의 저승에서 만난 아가멤논의 얼굴은 달랐다. 흙이 묻어 있었다. 왕도, 영웅도, 병사도 결국 같은 흙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호메로스는 그 흙 속에서 다시 목소리를 불러낸다. 황금 가면보다 먼저, 이름 없는 병사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것이 『오디세이아』 제11권의 가장 위대한 순간인지도 모른다.
영웅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영웅의 그림자 속에서 사라질 뻔했던 사람들도 기억해야 한다.
다시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병원에서 근무하며 가끔 장례식장 불빛을 바라본다. 퇴근 시간이 되어 건물에 불이 켜져 있으면 마음이 아프다고 했던 한 간호부장의 말이 떠오른다. 그 불빛 아래에는 이름 있는 사람도 있고, 아직 젊은 이름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는 모두 같은 인간이다.
호메로스가 저승에서 들려준 것은 죽은 자들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살아 있는 우리가 누구를 기억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오디세우스는 저승에서 영웅을 만나기 전에 이름 없는 엘페노르를 만났다. 아마 이것이 호메로스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오래된 가르침일 것이다. 영웅을 만나기 전에, 먼저 이름 없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라.
한 사회의 품격은 가장 위대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아니라,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기억하는가에서 드러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