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찍 인형 ‘바비’ 이제 늙었나?

인형가게에 쌓여 있는 갖가지 바비 인형 <사진=AP>

반세기 완구시장 주역, 매출 내리막

1959년 등장한 이래 50여 년 간 세계 장난감 인형 시장의 주연 자리를 지켜온 바비(Barbie)의 인기가 시들해져 가고 있다. 작년 초부터 바비 인형 매출이 감소세로 돌아선 끝에 올 2분기엔 판매량이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12% 떨어졌다고 한다. 이런 추세는 경쟁 심화와 바비 제작사 마텔(Matell, 본사 미국 캘리포니아주 엘 세군도)의 영업전략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수요자인 어린이와 부모들의 가치관 변화가 반영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스무 살쯤 새내기 숙녀를 캐릭터로 설정한 바비는 예쁘고, 비현실적일 정도로 날씬하며, 새침데기 표정에다 최첨단 패션을 걸친 것이 특징이다. 지금 성인이 된 전 세계 많은 여성들이 유년기에 바비를 갖고 놀았다. 이 인형을 은연 중 자신의 미래 모델로 삼았다가 성인이 되면서 그 꿈이 허황된 것임을 깨달았다. 그런데 이들의 자녀인 요즘 어린이들은 ‘너무 멋있는’ 바비보다 조금 현실적인 모습이거나 특이한 개성을 지닌 캐릭터 인형에 친근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바비 인형은 여성성 왜곡 등으로 비난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사진은 지난 5월 독일 베르린 ‘바비 드림하우스’ 전시장 앞에서 인형을 불태우며 시위를 벌이는 모습 <사진=AP>

외모 지상주의 가치관 탈피

실제로 바비 매출이 줄어드는 동안 마텔의 다른 인형 브랜드인 ‘아메리칸 걸(American Girl)’과 ‘몬스터 하이(Monster High)’ 등의 인기는 오르고 있다. 아메리칸 걸의 캐릭터들은 바비에 비해 촌스럽게 생겼고, 몬스터 하이는 깜찍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주요 경쟁사(MGM Entertainment) 제품인 브랫즈(Bratz) 인형들도 별로 귀엽지 않다.

바비 인형 탄생 배경을 살펴보자. 바비가 선보인 1950년대 전 세계의 장난감 인형은 모두 아기 또는 어린이를 캐릭터로 삼았다. 마텔 역시 이런 제품만 만들었으나 이 회사 창업자 겸 사장 부인 루스 핸들러(Ruth Handler)가 엉뚱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녀는 자신의 딸들이 인형을 갖고 노는 모습을 지켜보며 인형의 수요자가 어린이라고 반드시 그 캐릭터도 어린이여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딸들이 인형에 간호사·선생님·소방관 등 어른 역할을 부여하는 것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루스는 남편에게 어른을 캐릭터로 한 신제품을 개발해 보라고 권했으나 남편은 이를 시큰둥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그녀가 독일로 여행을 갔다가 그 곳에서 이미 젊은 여성을 캐릭터로 삼은 인형 빌트 릴리(Bild Lilli)가 인기를 얻고 있음을 본 뒤 남편을 다그침으로써 바비가 탄생했다. ‘바비’란 명칭은 이들 부부의 딸 이름 ‘바바라’의 줄임형이다.

바비 인형은 미국기업 제품이지만 생산은 일본에서 이뤄졌다. 인형에 입힐 작은 옷은 기계로 대량생산이 어려워 일일이 손바느질해야 했다. 이 작업의 최적지가 일본이었다. 정교한 인형옷 제작을 일본 여성들이 가내 부업으로 맡았다.

초기에 바비는 백인이 모델이었고 단지 머리칼만 금발(blonde)과 흑발(brunette)로 나눠 시장에 나왔다. 훗날 유색인종을 모델로 삼은 여러 변형제품들이 개발됐다. 지금 바비는 세계 150개 나라에서 팔리고 있으며 누적 판매량은 1997년 10억 개를 돌파했다. 마텔의 여러 제품 중 바비 한 가지의 매출이 2009년 기준 15억 달러에 이를 정도로 메가 히트 품목이다.

바비는 출시와 함께 돌풍을 일으켰지만 한편으론 비판과 거부감의 표적이 됐다. 지금까지도 이런 반감을 달고 다닌다. 가장 호된 질책은 젊은 여성들에게 ‘날씬 강박증’, 거식증 등을 유발한 주범이라는 지적이다. ‘바비 신드롬’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을 정도다.

중국 베이징 ‘바비 핑크 투어’ 전시회에서 한 소녀가 인형옷을 입혀보고 있다. <사진=신화사>

아동 포르노 제작 악용 경고도

실제로 핀란드의 한 종합병원은 여성이 바비 체형을 유지하면 체지방이 비정상적으로 낮아져 생리가 불가능한 상태에 이른다는 연구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여성운동권에서도 바비를 비판했다. 바비가 연출하는 분위기는 남성으로부터 사랑 받는 것을 인생의 유일한 목표로 삼은 구시대 여성상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이런 비난에 직면한 마텔은 바비 모습을 초창기의 그것과 다르게 몇 차례 수정해야 했다. 초기 버전의 바비는 키 175㎝에, 체형 36-18-33인치, 체중 50㎏인 여성을 설정하고 이를 축소한 치수로 제작됐다. 가슴은 풍만하지만 허리는 비현실적으로 가는 ‘모래시계 체형’이었다. 이 회사는 1997년 바비의 허리를 종전보다 굵게 리모델링했다. 또 초기 버전 바비는 ‘새침성’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같이 눈을 옆으로 흘기고 있었으나 요즘 제품은 정면을 응시한다.

바비가 겪은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92년 ‘말하는 바비’가 첫 선을 보였을 때 또 다른 논란이 야기됐다. 마텔은 현대여성의 실생활에 흔히 쓰이는 270가지 표현을 선정해 각 제품이 네 가지씩을 말할 수 있도록 설계했는데 그 중 “난 쇼핑이 좋아(I love shopping.)”, “원 없이 옷을 입어 볼 수 있을까(Will we ever have enough clothes?)”, “수학은 어려워(Math class is tough.)” 등이 과소비를 조장하거나 특정과목에 대한 편견을 심는다는 지적이었다. 회사는 문제의 표현들을 삭제해야 했다.

2003년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바비 인형 전 제품에 대한 판매금지 조치를 내렸다. 이슬람과 맞지 않는 가치관을 퍼뜨린다는 이유였다. 30분 간 녹화할 수 있는 비디오 카메라를 장착한 ‘비디오 걸’이라는 또 다른 바비 제품이 2010년 출시됐을 때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이 제품이 아동 포르노 제작에 악용될 수 있다는 경고를 내리기도 했다.

바비는 인형으로 탄생했지만 그 뒤로 의류·화장품 등의 브랜드, 비디오 게임, 아동도서 등의 캐릭터로 진화했다. 마치 사람이 어릴 때 보는 만화가 일생 동안 인품에 영향을 주듯 바비는 인형을 넘어 한 시대의 풍속과 이념까지 규정하는 변수 구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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