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에고 가르샤’를 아시나요

하늘에서 본 디에고 가르샤(2006년 미군 당국 촬영). 산호초의 특성상 마치 널브러진 밧줄 형상으로 육지가 형성돼 있다.

인도양 절해고도, 미군기지에 쫓겨난 차고스인들의 눈물과 투쟁

전 세계 미군기지 중 전략적 중요성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 디에고 가르샤(Diego Garcia)다. 1991년 걸프전과 2001년 이후 ‘테러와의 전쟁’에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으로 출격한 미군 전투기의 주 발진기지가 이곳이다. 그럼에도 미국인을 포함해 세계인 대다수에게 이 지명은 생소하다.

차고스 군도(Chagos Archipelago)는 더욱 낯설다. 이 군도에 살던 사람들 즉 차고스인(Chagossian)은 군도의 일부인 디에고 가르샤에 1970년대 초 문제의 미군기지가 들어서면서 모두 쫓겨났다. 차고스 군도는 인도양 한가운데 있다. ‘절해고도’란 말이 있지만 이런 곳은 드물다. 북으로 1800km 가야 인도 남쪽 끝에 닿고, 서로 3650km 가야 아프리카 대륙이 나온다. 동쪽 인도네시아, 호주와도 수천km 떨어져 있다. 군도를 이루는 섬들은 모두 억겁에 걸친 산호충 활동으로 형성된 산호초(coral reef)다. 섬 규모는 가장 큰 디에고 가르샤 면적이 27㎢다.

무인도였던 이들 섬에 프랑스가 18세기 말 영유권을 선언하고 야자수 농장을 차려 흑인노예를 불러들였다. 나폴레옹 전쟁 직후 패전국 프랑스는 차고스 군도를 포함한 인도양 자국령 섬들을 영국에 넘겼다. 1968년 독립한 모리셔스(Mauritius)도 이 때 영국령이 됐다. 농장의 흑인들은 영국 치하에서 자유인으로 해방돼 농장에 취업하거나 어업으로 생계를 꾸렸다. 1971년 당시 약 2000명이던 차고스 사람들은 영국 당국에 의해 전원 강제추방돼 1600km 떨어진 모리셔스 등지로 보내졌다. 길게는 6대에 걸쳐 차고스 군도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집단의 뿌리가 뽑혔다.

모리셔스의 차고스 사람들. 가운데 팔을 든 사람이 난민회 대표 올리비에 반쿠다. 2007년 그가 런던 당국자들을 만나고 돌아왔을 때 환영식 장면이다.

이라크전 미 전투기 발진기지

영국과 미국은 여러 해 전부터 디에고 가르샤를 군사기지로 만들기 위한 공작을 진행했다. 두 나라는 1966년 디에고 가르샤 조차(租借) 비밀협약을 맺었다. 미국이 2016년까지 50년 간 빌려 쓰되 만기 2년 전인 2014년까지 합의할 경우 기간을 20년 연장한다는 내용이다. 협약은 두 나라 의회에까지 비밀에 붙여졌다. 협약을 정식 조약으로 체결할 경우 의회 비준을 얻어야 했기 때문에 양국 행정부는 이를 ‘각서 교환(Exchange of Note)’ 형식으로 처리했고 조차금 1400만 달러는 별도의 지급 절차 없이 영국이 미국산 미사일을 도입할 때 이 액수만큼 깎아주는 편법을 취했다.

냉전의 한기가 세계를 뒤덮은 때였으니 소련의 인도양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서방 군사기지를 두기로 한 양국 합의는 납득 가능하다. 협약을 비밀로 했던 것도 불가피한 테크닉이었다고 치자. 문제는 이 과정에서 희생자가 된 차고스 사람들이 온당한 대접을 받았느냐는 점이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 추방 1세대 생존자는 1000명 미만이지만 추방 이후 4000명 가량의 후예가 출생해 지금 ‘차고스인’으로 불리는 사람은 5000명 안팎이다. 이들은 대체로 흑인 혈통이지만 야자수 농장에 추가로 유입된 인도와 말레이 계통 사람들의 피도 섞여 있다. 이들의 일상언어는 프랑스어를 바탕으로 현지에서 변형된 말이다.

차고스인 대부분은 지금 모리셔스에서 빈민층으로 곤고하게 살고 있다. 추방 당시 이들은 머잖아 고향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고 별다른 보상도 없이 떠났다. 영원히 귀향할 수 없을 것이란 사실을 새 땅에 온 뒤에야 알게 되면서 많은 수가 화병으로 숨졌고, 상당수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일부 여성은 몸을 팔아 목숨을 부지해야 했다.

차고스인을 몰아낼 당시 영국과 미국 당국은 인종차별과 편견에 의거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두 강대국은 이들을 대수롭잖게 여겨 강제이주의 문제점을 고려하지 않았음이 비밀시효가 해제된 문서, 2010년 위키리크스 파동 때 공개된 외교전문, 관계자들의 뒤늦은 고백 등을 통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래픽=김춘열>

강제추방 당시 주민 미개인 취급

차고스 사람들은 디에고 가르샤는 물론 군도의 몇몇 다른 섬에 마을을 이루고 학교·교회·병원·감옥에 철도까지 운행되는 ‘사람 사는 세상’을 꾸리고 있었다. 당시 생활상이 1950년대 선교사들이 찍은 기록영화에 남아 있다. 그러나 영미 정부는 조차협상에서 이들을 주민이 아닌 ‘임시 계약직 근로자’로 규정했다.

미국정부의 한 관계자는 디에고 가르샤를 거주자가 없는 상태로 넘겨줄 것을 영국에 주문하면서 이 작업을 ‘청소(sweep)’와 ‘멸균(sanitize)’이라 표현했다. 차고스 사람을 ‘타잔’ 또는 ‘맨 프라이데이(Man Friday)’로 부르기도 했다. 프라이데이는 소설에 나오는 식인종 출신 흑인으로 야만스럽지만 우직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오랜 진정과 법정투쟁 끝에 이들은 1982년 영국정부로부터 총 400만 파운드의 보상을 받아냈다. 그러나 추가보상과 귀향허용 등을 청구하는 갖가지 소송이 영국, 유럽연합 그리고 미국 법정에서 여전히 진행 중이다. 모리셔스 수도 포트 루이스의 한 허름한 사무실을 본부로 쓰는 ‘차고스난민회(대표 올리비에 반쿠)’가 투쟁의 구심점이다. 영국 지도층에서도 이들의 명분에 동조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호주 출신으로 영국에서 일하는 언론인 존 필거(John Pilger·74)가 소외된 소수집단 차고스인들이 강대국을 상대로 벌이는 이 투쟁을 세상에 알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차고스인들은 디에고 가르샤로 돌아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받아들여 군도 내 다른 섬으로 귀환할 것을 기대하지만 미국의 입장이 단호하다. 기지에서 가까운 섬에 사람이 살면 테러분자가 발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디에고 가르샤에는 현재 전투기 활주로 2개와 항공모함 계류장을 포함한 해·공군 시설과 골프코스, 볼링장 등 주둔인력 위락시설이 있다. 주둔인원은 군인과 군속을 합해 약 3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군 300명 가량도 포함돼 있다.

영국 법원은 군도 일대 ‘해양보호구역’ 지정 무효화를 청구한 차고스인들의 제소를 최근 기각했다. 영국 정부는 2010년 보호구역 지정을 통해 차고스인의 생계수단이던 어로행위를 전면 금지했다. 명분은 생태계 보전이지만 주민귀환을 원천봉쇄 하려는 술책이었음이 위키리크스 공개 문서를 통해 드러났으나 법원은 이를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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