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민간인 ‘총기 보유권’ 근거 있나
*캐나다 밴쿠버에서 ‘주간동아’ 미주통신원으로 활동하는 황용복 기자가 ‘미국사회의 총기문화’를 심층 분석했습니다.?지난 칼럼 ‘①통계로 보니…’?에 이어, 이번엔 ②친총(親銃)의 교조(敎條) ‘제2 보완조항’입니다. 이어?③친총(親銃) 논리의 허와 실 ④총기 ‘문화’의 본산 NRA ⑤’총기주의’라는 종교 혹은 사교(邪敎) 등의 주제로 다섯 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아시아엔(The AsiaN)
“연방이 독재 펴면 주(州)가 항쟁”
민병대 무장권이 총기 ‘문화’의 뿌리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군경이 아닌 민간인은 원칙적으로 총을 지니지 못한다. 예외적으로 사냥이나 스포츠사격 등에 필요한 총은 민간이 보유할 수 있지만 이 경우 허가제·등록제 등 엄격한 규제가 따른다. 미국은 반대다. 미국 민간인은 원칙적으로 총을 보유할 권리가 있고, 이를 위해 허가를 받거나 등록할 의무가 없다. 다만 모든 총을 무제한 허용할 수는 없다고 보고 만든 규제들이 현행 총기 관련 법이다.
미국 헌법에 민간인의 총기 보유에 관한 조항이 하나 포함돼 있다. 세계에서 유례가 드문 미국식 총기관(觀)의 출발점인 이 조항은 건국 당시 미국의 중요한 제도였던 민병대(民兵隊, militia)와 관련해 민간인 무장권을 인정하고 있다. 그 전문은 이렇다.
“기강이 잘 선 민병대가 자유로운 주(州)의 안보를 위해 필요한 상황에서, 주민이 무기를 보유·휴대할 권리가 침해되지 않는다./ A well regulated militia, being necessary to the security of a free State, the right of the people to keep and bear arms shall not be infringed.”
“주의 안보”라는 엉뚱해 보이는 용어를 이해하기 위해 당시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모태가 된 동부 13식민지들은 상비군 없이 각 식민지가 자체적으로 민병대를 결성해 군사력을 유지했다. 이들은 그 시절 북미 프랑스 식민지 퀘벡과 군사적으로 대립했을 뿐 아니라 인디언 습격, 주민 내부 폭동 등에 대비해 무장 공권력이 필요했었다. 북미 영국령을 방어할 최종 책임은 영국이 졌었지만 대규모 영국군이 현지에 상주할 수 없어 그 1차적 책임은 현지인 몫이었다. 민병대는 평소 민간인 자격으로 각자 생업에 종사하다가 유사시에 소집돼 군인으로 복무하는 병력을 말한다. 민병대원은 평소 총과 총알을 각자 집에 보관했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났다. 영국은 반란 진압을 위해 본국 정규군을 파견했고, 이에 맞선 현지 군대가 민병대였다. 영국 정규군은 상비군인 동시에, 직업군인이었는데 비해, 식민지 민병대는 일종의 아마추어 군인이었다. 이들은 출신 식민지 별로 복장도 무기도 제 각각이었는데다 충성의 귀속점도 각자의 출신 식민지였다. 이 때문에 지휘체계가 혼란스럽다는 사실을 독립 지도자들이 깨달아 ‘대륙군’이란 이름의 통합군을 결성했지만 이후에도 각 전투에는 빠짐 없이 현지 민병대가 대륙군을 거들었다.
독립 전 13개 식민지는 공통적으로 영국 치하에 있긴 했으나 정치적으로 각각 다른 ‘나라’처럼 행동했다. 각 식민지는 이웃 식민지와 물자 교역을 한 것 외에는 별다른 연대도 간섭도 없이 각각의 정부를 통해 자치를 했다. 이 전통에 따라 각 식민지는 독립선언 직후부터 자신들의 고장을 ‘국가’라는 뜻의 ‘스테이트(state)’로 호칭했다. 1776년 미국 독립선언서의 정식 제목은 “아메리카에서 연합한 열 세 국가들의 일치된 선언(The unanimous Declaration of the thirteen united States of America)”이었고, 뒷날 이 제목 뒷부분이 미국 국호가 됐다.
8년 간의 전쟁 끝에 1783년 독립이 확정됐지만 스테이트들이 하나의 연방으로 통합돼 그 헌법이 확정되고 연방정부가 수립된 것은 그로부터 6년이 지나서였다. 이 과도기에 미국인 중 연방정부 수립에 회의를 갖는 사람이 많았다. 큰 나라 영국을 싸워 쫓아낸 마당에 스테이트 정부 위에 새로 큰 정부가 들어서면 런던이나 마찬가지인 새 압제자가 되지 않겠느냐고 이들은 우려했다. 연방 대통령이 종당에 군주로 등극할 것이라는 예견까지 나왔다. 그 시절 미국인에게 ‘연방’ 개념이 생소했다.
독립전쟁 기간 열 세 스테이트들은 공동보조를 위해 ‘대륙의회(Continental Congress)’라는 협의기구를 설치했었다. 연방결성 반대론자들은 앞으로도 이 기구를 활용해 필요한 경우 협력하고 평소에는 각각의 독립국으로 가야 한다고 믿었다. 실제로 뒷날 스페인 치하의 중남미가 여러 나라로 나뉘어 독립했듯, 열 세 개 독립국으로 존속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이 논란 속에 연방결성주의자(Federalist)들이 대륙의회 이름으로 헌법 초안을 밀어붙여 열 세 스테이트 의회들에게 비준, 즉 연방 가입 의사 결정을 요구했다. 압도적 찬성으로 비준한 곳은 소수였고 대부분은 팽팽한 토론 끝에 어렵게 비준했으며, 덩치 큰 버지니아와 매사츄세츠는 조건부 비준을 했다. 그 조건이란 빠른 시일 안에 연방의 전횡에 제동을 걸 장치들을 헌법에 추가한다는 것이었다.
제동 수단으로 중요하게 거론된 것이 연방정부가 통수하는 상비군 규모를 최소화하고 대신 종전대로 스테이트들이 통수하는 민병대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연방이 횡포해지면 스테이트가 민병대 무력을 바탕으로 연방을 탈퇴할 수 있다는 으름장이었다. 이 위협이 뒷날 현실화돼 남북전쟁이 났다. 비준 조건 중에는 또 미국인이라면 공통적으로 누려야 할, 다시 말해 연방이 어떤 조치를 취해도 침해되지 않을 기본 권리를 헌법에 열거해야 한다는 요구도 있었다.
이런 진통을 거쳐 연방이 탄생하자 그 의회는 곧 바로 헌법에 추가할 보완조항 열 개를 만들어 1791년 발효시켰다. 이들 10개 항을 합쳐 ‘권리장전(Bill of Rights)’이라고도 부른다. 그 중 ‘제2 보완조항(Second Amendment)’이 민간인 총기 보유권의 근거로 인용되는 문제의 대목이다. 나머지 아홉 개는 종교 자유 보장, 영장 없는 압수·수색 금지, 배심제 재판 보장 등이다.
이 ‘제 2 보완조항’이 흔히 ‘수정헌법 제2조’로 번역되고 있으나 이는 적절치 않아 보인다. 한국과 달리 미국은 건국 후 헌법 원문을 한 번도 수정하지 않았고, 새 규정이 필요한 경우 보완조항을 추가하는 방식을 취해 오고 있다. 권리장전 외에 노예제 폐지, 대통령 3선 금지 등이 모두 보완조항을 통해 헌법의 일부가 됐다.
연방정부 수립 후의 스테이트를 한국에서 ‘주’로 번역한다. 당초 미국인은 연방이 주의 적이 될 수 있다는 인식으로 제2 보완조항에 “주의 안보”라는, 미국인 아니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을 썼다.
220여 년 전 만들어진 헌법 제2 보완조항이 요즘 민간인 총기 보유권의 근거가 될 수 있느냐를 놓고 지금 미국인들 사이에 깊은 골을 사이에 두고 의견이 갈라져 있다. 전국총기협회 즉 NRA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친총(親銃, progun)’ 진영에서는 이 조항이 민간인 총기 보유권의 불변의 보장이라 주장한다. 이들은 ‘제2 보완조항’을 ‘총기보유권’과 동의어로 쓴다. 친총 단체 중에 ‘제2 보완조항 자매들(Second Amendment Sisters)’이라는 여성 모임도 있고 ‘제2 보완조항 재단(Second Amendment Foundation)’이라는 곳도 있다.
친총의 반대 편 즉 반총(反銃, antigun) 쪽에서는 이 조항이 그 옛날 민병대의 저항권에 관한 것이어서 지금 민간인과 상관 없으며, 설사 상관이 있더라도 총기 규제는 지금보다 더 엄격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견해가 나오기 전까지 오랫동안 미국인들은 제2 보완조항이 민간의 총기보유를 보장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따라서 이 조항을 요즘 세상에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쟁점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들어 사정이 달라졌다. 총의 병폐가 끊임 없이 불거지면서 연방과 각 주가 여러 규제를 내놓자 친총 쪽에서 그 무효화 소송을 잇달아 제기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 과정에서 제2 보완조항에 관한 각급 법원의 해석이 엇갈리자 헌법학자·역사학자 등이 이 조항 재조명에 나섰다. 이 조항이 문맥 면에서 당초부터 혼란 소지가 있었다는 지적도 나왔다.
제2 보완조항 문장 전반부는 민병대의 필요성을 말한 분사구이고, 후반부는 시민의 총기 보유권을 언급하고 있다. 이 전반부와 후반부가 논리적으로 어떻게 연관되는지 불분명한 채 크게 봐서 다음 두 갈래 해석이 나온다.
첫째는 민병대가 무장해 주의 자유를 지켜야 하듯 일반 시민도 개별적 자위 수단으로 총을 지녀야 한다는 뜻이라고 보는 해석이다. 둘째는 민병대가 항쟁할 권리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민병대의 잠재적 자원인 일반 시민을 언급했다는 해석이다. 원문의 ‘민병대’ 앞에 ‘기강이 잘 선’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은 일반 시민이 그 자체로 민병대가 아니라는 뜻의 뒷받침이라는 것이다. ‘개인적’ 권리를 강조한 전자는 친총의, ‘집단적’ 권리를 강조한 후자는 반총의 논리다.
2000년대 들어 연방 하급 법원들의 총기 규제 관련 판결이 거의 개인적 권리 설로 쏠린 끝에 2008년 연방대법원도 제2 보완조항이 일반 시민의 개인적 자위권으로 총 보유를 보장한 것이라고 판결했다. 친총 손을 결정적으로 들어준 해석이었다. 연방대법원은 그러나 총에 관한 기존 각종 규제가 위헌이라는 뜻으로 이 해석이 인용돼서는 안 된다는 단서를 붙임으로써 충격이 완화됐었다. 판결에 앞서 수많은 전문가들이 의견을 개진했고, 대법원 판사들 간에도 치열한 논란이 벌어진 끝에 5대 4 다수결로 이 판결이 채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