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31일] 파나마 운하 소유권 파나마로
2006년 印尼 여객선 침몰 460여명 사망실종
2006년 마지막 날인 12월31일 승객과 승무원 638명을 태우고 항해하던 인도네시아 국내 여객선 ‘세노파티(Senopati)’호가 중부 자바섬 연안에서 높이 5~6m의 파도와 조우했다. 파도는 엄청난 폭풍우와 함께 배를 덮쳤고, 최소 460여명이 숨지거나 실종됐다.
인도네시아 국영 안타라통신은 “1000명이 탈 수 있는 세노파티호에는 사고 당시 587명의 승객과 40명의 선원을 포함해 638명이 있었다”며 “31일 177명이 구조됐다”고 보도했다. 침몰한 세노파티호는 30일 저녁 보르네오섬에 있는 중부 칼리만탄주의 쿠마이항을 떠나 자바섬의 수마랑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2002년 12월31일 세계에서 처음으로 상업용 자기부상열차가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개통식을 갖고 시범운행에 성공했다. 이날 시범운행에서 열차는 상하이 시내와 푸둥(浦東) 공항의 31㎞ 구간을 8분 만에 주파했다. 평균 시속과 최고 시속은 각각 300㎞와 430㎞.
이날 개통식에는 주룽지(朱鎔基) 중국 총리와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 등이 참석했다. 독일이 이 자기부상 열차의 차량제작과 운영기술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번 자기부상철도 건설에는 약 10억달러가 투자됐으며 독일 지멘스사와 티센그룹이 설계와 시공을 맡았다. 독일은 이 프로젝트와 관련해 중국측에 열차를 무상공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상하이 자기부상열차는 상하이시 지하철 2호선 룽양루(龍陽路)역~푸둥 국제공항 간 31㎞ 구간을 달린다.
미국은 60년대 자기부상열차 연구를 시작했다가 1975년 중지했고, 영국은 1980년대 말 도입했다가 1996년 운행을 포기하는 등 아직 자기부상열차가 상용화된 나라는 없다.
자기부상열차는 전자력의 힘으로 차체가 철로에서 약 1㎝ 뜬 채로 달린다.
1999년 미국, 파나마에 운하 소유권 완전 이양
1999년 12월 31일 파나마운하의 소유권이 미국에서 파나마로 완전히 넘어갔다.
1977년 파나마 실력자 오마르 토리호소 장군과 미국 지미 카터 대통령 사이에 체결된 조약에 따른 조치였다. 1968년 국민수비대가 오마르 토리호스 대령의 지휘 아래 쿠데타를 성공시켰고, 이 쿠데타 지도자가 미국의 카터 대통령과 1977년 파나마 운하 조약을 협상했다.
이 조약에 따라 1999년 이후부터 파나마가 파나마운하에 대한 운영권을 갖게 됐다.
[파나마운하 연혁]
1881-00-00 – 프랑스의 레셉스, 대양간운하만국회사를 설립하고 수평식운하 건설 착수
1889-00-00 – 회사 파산으로 건설공사 중단
1894-00-00 – 신(新)파나마운하회사 설립
1901-00-00 – 미국, 영국으로 부터 운하 건설 운영권을 인정받음 (2차 헤이-폰스포트조약)
1903-01-00 – 미국-콜롬비아, 미국이 운하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것을 인정하는 조약 체결
1903-07-29 – 미국, 프랑스 회사로부터 운하굴착권과 기계·설비 일체를 4000만 달러에 구입
1903-11-03 – 미국의 도움으로 파나마 독립.
1903-11-06 – 미국, 파나마 독립 승인
1903-11-18 – 미국-파나마, 파니마운하 조약(헤이-뷔노 바리야 조약) 체결
1904-05-04 – 미국, 프랑스로부터 신파나마운하회사의 운하 소유권을 인수
1906-00-00 – 파나마 운하 최종설계도 채택
1914-08-15 – 파나마 운하 완공, 개통
1977-09-07 – 신 파나마 운하조약 체결
1978-06-06 – 파나마 운하 통제권 이양에 관한 조약 체결
1979-10-01 – Return of Canal Zone to Panama
1999-12-31 – 파나마 운하 통제권 파나마정부에 완전 이양
1999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사임
“국민 여러분의 꿈이 이루어지지 못한 점에 대해 용서를 빕니다.”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1999년 12월31일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블라디미르 푸틴 당시 총리를 대통령 직무대행으로 지명한 뒤 핵 미사일 암호를 넘겼다. 옐친 대통령은 이날 낮 12시 러시아 공영 ORT TV 를 통해 “건강문제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당면한 큰 과제가 많고, 이러한 과제들은 보다 새로운 세대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사퇴한다”고 말했다. 옐친 대통령은 사임 발표에 앞서 푸틴 총리와 단독 면담을 가졌다.
그가 주도한 자본주의 경제정책은 실패했고, 만연된 관료사회의 부패 방관, 시위대 2000여명 무력 진압, 부유층 지지기반, 체첸 공화국에 대한 무차별 폭격 등은 러시아 국민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미국 대통령 클린턴과도 언쟁을 벌일 정도로 다혈질의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KGB 출신의 새 러시아 지도자 푸틴에게 바통을 넘긴 옐친은 사임 7년 뒤인 2007년 4월23일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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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합의
북한의 핵개발 의혹이 제기되기 시작하던 1991년 12월31일 남북 양측은 판문점에서 5일 간의 마라톤 협상 끝에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탄생시켰다.
6개항으로 된 합의문은 남북의 핵무기 시험·제조·생산·접수·보유·저장·배비·사용을 금지하고 핵 재처리와 우라늄농축 시설 보유를 금지했다. 핵 에너지를 평화적으로만 사용한다는 것과 남북한의 핵시설에 대한 동시사찰도 명시됐다.
합의문 초안부터 미국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이 합의로 인해 한국은 원자력산업 발전에 필수 요소인 재처리와 농축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북한의 핵개발을 포기시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2002년 북한의 우라늄농축 의혹으로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가 깨졌을 때 비핵화공동선언은 합의 파기의 중요한 근거가 됐다. 제네바합의에 우라늄 농축 자체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우라늄 농축을 금지하고 있는 비핵화공동선언을 준수할 것을 명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제네바 합의를 깨는 데 비핵화공동선언이 이용됐다. 북한은 이후 핵확산방지조약(NPT)도? 탈퇴, 비핵화공동선언은 완전히 사문화됐다.
2005년 노무현 정부 당시 9·19 공동성명 때 비핵화공동선언이 부활했다. 그 사이 북한 핵문제의 당사국에서 남한의 제외됐고, 6자회담 틀에서 다뤄지게 됐다.
1977년 캄보디아, 베트남과 외교 단절
캄보디아 폴 포트 정부는 1977년 12월31일 베트남과의 외교관계를 끊는다고 발표한 뒤 베트남 주재 캄보디아대사관 직원들을 모두 본국으로 불러들였다. 이유는 분명했다. 며칠 전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를 침공, 서울보다 큰 면적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크메르루주 정권의 학살극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친 소련 노선의 베트남과 친 중국 노선의 캄보디아 사이에 누적된 오랜 갈등이 두 나라 사이의 분쟁과 외교단절을 가져온 것으로 분석됐다.
1979년 초 캄보디아에 친 베트남 정권이 수립되지만 중공군의 베트남 침공이 뒤따르고 베트남군은 같은 해 9월 캄보디아에서 전면 철수한다.
1975 – 진시황릉 발굴
1975년 12월31일 진시황릉이 발굴됐다. 진시황릉은 중국 산시성 린퉁현 여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시황제의 구릉형 묘. 사기 ‘진시황본기’에 따르면, 시황제 즉위 초부터 착공돼 통일 이후엔 70여만 명이 동원돼 완성됐다.
내부에는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드는 등 천상과 지상을 모방한 지하 궁전을 만들고 도굴자가 접근하면 화살이 자동발사하는 시설도 갖췄다고 한다.
능원 동문 밖 거대한 병마용갱은 세계적인 관심거리가 됐다. 능원 밖에서 발견된 100여 개의 형도묘는 건설 당시의 가혹한 강제노역의 실상을 짐작케 했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진시황릉 병마용갱 발굴 연혁]
1974.03.29 – 진시황릉 병마용갱 1호갱 발견
1974.07.15 – 진시황릉병마용갱 발굴 시작
1975.07.21 – 신화사 통신이 진시황릉병마용갱 발굴 소식을 보도
1975.12.31 – 진시황릉 병마용갱 발굴 시작
1976.04.00 – 진시황릉 병마용갱? 2호갱 발견
1976.05.11 – 진시황릉 병마용갱? 3호갱 발견
1979.00.00 – 진시황릉 병마용 박물관 건립(시안)
1987.00.00 – 진시황릉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재
2009.06.13 – 진시황릉 병마용갱 3차 발굴 시작
1973 한국-아프가니스탄 수교
아프카니스탄은 남한과 1973년 12월31일에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일주일 정도 앞서 북한과 먼저 수교를 맺었다.
1975년 카불에 상주대사관을 개설했으나, 1978년 9월 공산정권 수립을 이유로 단교했다. 단교 기간인 1978~1998년 동안 대(對)아프가니스탄 무상원조 270만 달러를 유엔을 통해 지원했고, 난민구호사업(1995년 7월)과 지진피해복구 지원(1998년 2월) 등은 꾸준히 해왔다.
나지불라(Najibullah) 정권이 재수교를 요청했지만 거부했다. 2002년 1월31일 양국 외교장관이 공동성명에 서명, 양국관계가 재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