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26년 내전’ 상처극복이 과제
타밀족 학살 의혹…인도 남부 타밀나두와 갈등 상존
인도 남부 타밀나두주 총리인 자얄라리타(Jayalalithaa)는 지난 3월 스리랑카 출신 크리켓 선수들이 첸나이의 IPL(Indian Premier League)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요청하는 편지를 만모한 싱 총리에게 전했다. IPL리그는 인도의 크리켓 프로리그로서 국적, 은퇴 여부에 상관없이 선수와 계약을 통해 팀을 구성한다. 크리켓은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 등 남아시아의 최고 인기스포츠다. 자얄라리타는 이 리그에 스리랑카 팀이 참가하는 데 거부감을 표시한 것이다. 앞서 타밀나두 주정부는 스리랑카 팀이 참가한다는 이유로 아시아 육상대회 개최를 거부한 바 있다.
타밀나두 주의 이런 행동은 스리랑카 내전 당시 싱할라족(75%) 주도 정부군이 소수 힌두계인 타밀족(18%)에게 심한 잔혹행위를 한 의혹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다. 스리랑카 정부는 2009년 26년간 내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타밀반군과 민간인 대학살 행위를 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왔다.
스리랑카 내전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주요 권력을 독점해 온 불교계 싱할라족에 대해 타밀족이 1983년부터 분리투쟁을 일으키면서 촉발됐다.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로 불린 타밀반군은 스리랑카 북부·동부지역을 거점으로 대규모 반정부 투쟁을 벌였다. 30년 가까운 내전기간 동안 휴전과 폭동, 테러를 반복해온 탓에 스리랑카 정부가 LTTE를 축출하고 승전선언을 한 뒤에도 ‘정말 전쟁이 끝난 것인지’ 의심을 품은 이들이 많다.
영국의 타밀인 우대가 갈등 씨앗
스리랑카에 인도 타밀족이 이주한 것은 기원전 3세기로 알려져 있다. BC 246년 불교를 받아들인 뒤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군대 양성에 소극적이었던 스리랑카 왕조가 주로 타밀인을 용병으로 활용하면서 이들의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됐다. 5·6세기에는 남인도 힌두 타밀 제국이 불교 싱할라 통치자들을 위협하는 세력이 됐다. 14세기 초 번성했던 폴론나루와 왕권이 쇠퇴하면서 스리랑카 북쪽 지역인 자프나(Jaffna)에 처음으로 타밀 왕조인 자프나빠트남이 세워졌다. 싱할라 왕조의 북쪽 수도가 쇠퇴하고 남쪽으로 이주가 계속되면서 북쪽 해변가에 거주하는 타밀인들과 남쪽, 섬 안쪽에 거주하는 싱할라인들 사이에 열대밀림이 자연적인 완충지 역할을 했다.
이런 양상은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의 식민지배가 이어지면서 바뀌었다. 식민지배를 받는 동안 많은 타밀인들이 남쪽으로 이주하면서 두 문화가 서로 한데 섞여 혼합됐다. 특히 영국인들이 1843~1859년 플랜테이션 사업을 위해 타밀 노동자들을 데리고 오면서 스리랑카의 인종분포에 큰 변화가 생겼다. 이들은 지리·역사·계급적으로 자프나 타밀과도 확연히 구분됐다.
현대 싱할라-타밀 갈등은 영국 식민지 시절 시작됐다. 영국 관리인들은 식민지배를 하기 위해 영어사용이 가능하고 지식을 갖춘 타밀인을 중용했고, 타밀인은 교육과 공무수행 분야에서 우월적 지위를 누렸다. 싱할라족은 이러한 영국의 타밀 우대정책에 반발했으며 싱할라인들의 박탈감은 1948년 독립을 맞으면서 반타밀 정서로 발전됐다.
경제가 침체돼 있던 195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싱할라-타밀 갈등이 시작됐다. 그들은 복지·일자리 쟁취를 위해 싸웠다. 특히 싱할라 주요 정당들은 타밀인 동맹국가인 인도에 의해 자신들의 종교·언어·문화가 사라질 것을 두려워했다. 소수 민족인 타밀인들은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들의 거주지역이자 지지기반인 북쪽과 동쪽 지역에 대한 자치권 행사와 연방제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싱할라어 유일 공용어 제정 등 싱할라 민족주의 정책의 본격 시행은 북쪽과 동쪽에 거주하는 타밀인들을 분노하게 했다. 독립 이후 서서히 지속돼온 싱할라와 타밀 간 충돌의 서막이었다.
전쟁은 끝났다. 종전이라는 큰 업적을 달성한 마힌다 라자팍사(Mahinda Rajapksa) 대통령은 2010년 내전 종식을 위해 함께 일했던 폰세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국가 통합과 경제 발전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현재 자프나로 향하는 새로운 도로를 건설하고 타밀, 싱할라어 교육을 강화하는 등 내전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내전 피해자에 대한 지원과 전쟁범죄 책임 규명, 피해지역 재건과 지뢰 제거 등 당면한 과제가 산적해 있다. 유엔 산하 스리랑카 내전조사위원회, 스리랑카 진실화해위원회, 유엔 인권이사회 등이 잇따라 보고서와 결의안을 채택하면서 내전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움직임도 활발하다.
“‘실론’은 ‘스리랑카’ 잘못 발음해서 생긴 말”
‘러브 인 아시아’의 이레샤가 전하는 스리랑카의 매력
스리랑카는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나라입니다. ‘돌 하나 던져도 싹이 난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풍요로운 자연환경을 갖고 있죠. 수박 먹다가 휙 던지면 정말 며칠 후에 싹이 납니다. 또 여러 종족들이 함께 모여 살다 보니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폭이 넓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짜고 매운 음식을 좋아하잖아요? 스리랑카 사람들도 비슷한 것 같아요. 닭볶음 등 자극적인 음식이 많죠. 스리랑카 하면 뭐니뭐니 해도 ‘홍차’ 겠죠. 누가 뭐래도 차는 실론티죠. 그런데 여기서 실론이란 말은 영국 지배 당시 스리랑카를 실론이라 발음하면서 생긴 거예요. 스리랑카가 정확한 발음이죠. 홍차 외에 루비, 진주, 고무나무가 풍부한 곳이기도 합니다.
최근 스리랑카 콜롬보와 인천 직항이 개설됐죠? 스리랑카 사람으로 너무 기쁜 일입니다. 매월 20만원씩 모아 1년에 한번씩은 가족들과 친정집에 가려고 노력합니다. 올해는 직항을 타고 빨리 가게 돼 너무 좋아요. 한국 사람들에겐 몰디브 해변이 유명한데, 스리랑카 해변을 한 번 보여주고 싶어요. 8월의 마타라 해변은 환상 그 자체입니다. 꼭 한번 가 보세요.
스리랑카는 과거 타밀 반군과 오랜 내전의 상처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내전 당시 남자들이 너무 많이 죽어서 여자만 사는 나라가 되는 게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어요. 18세 이상 남자들이 모두 총을 들고 나갔으니까요. 지금은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에 있어요. 타밀족은 좀 더 늘어나고 있고요. 그래도 서로를 인정하며 살고 있어요. <이레샤?페레라 이주여성 자조단체 ‘톡투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