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피난처 ‘케이만군도’를 가다
“이왕 왔으니 회사 하나 만드시죠”
회사 설립, 돈만 내면 오케이…가볼 필요도 없어
대기업 영업사원 K씨는 지난 1993년 일본에서 파견근무 하던 중 퇴사해 선박사업을 시작했다. K씨는 20년만에 수 백 척의 선박을 보유한 10조원대 재력가로 급성장했다. ‘선박왕’이라는 별명이 그에게 붙었다. 그런 K씨가 지금 탈세 혐의로 한국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국세청은 K씨가 설립한 법인과 K씨가 한국에 세금을 내지 않았다며 가산세까지 더해 약 4천억원의 법인세와 소득세를 부과했다. 국세청은 K씨가 일본, 홍콩 등에 거주하면서 한국인이 아닌 것처럼 조작했고, 케이만군도 등 조세피난처에 기업을 설립해 세금을 탈루했다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해 K씨는 자신이 한국거주자가 아니며, 일본에서 사업을 시작해 전 세계로 확장한 것일 뿐 탈세를 위해 해외로 나간 것이 아니고, 사업을 한 나라에서 세금을 제대로 납부했기 때문에 한국에 세금을 낼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전 세계 조세피난처 50여 곳, 유령회사 200만개
요즘 뜨거운 관심사가 된 조세피난처란 과연 무엇인가. 케이만군도, 바하마 아일랜드, 버진 아일랜드, 라부안 등 세금이 없거나 세율이 낮은 국가 또는 지역을 말한다. 일정 소득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홍콩, 싱가포르, 벨기에, 룩셈부르크, 아일랜드 등도 조세피난처로 분류된다. 전 세계 조세피난처는 50여 곳에 이른다. 그 중에서도 케이만 아일랜드는 버진 아일랜드와 함께 세계 최대 규모다. 도대체 케이만군도는 어떤 곳일까.
케이만군도(Cayman Islands)는 미국 남부 카리브해에 위치한 영국령의 조그만 섬나라다. 인구는 5만명 정도, 1인당 국민소득이 4만 달러가 넘는다. 소득세, 법인세, 상속세를 낼 필요가 없는 조세피난처인 동시에 세븐마일비치, 골프코스 등 각종 레저시설이 갖춰져 있어 미국·영국인들이 좋아하는 휴양지다.
한국에서는 케이만군도에 가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필자가 업무차 케이만군도에 갈 때는 방문비자 받는 데만 한 달 넘게 걸렸다. 영미권 사람들이 사흘 안에 비자를 받을 수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비자를 케이만군도 정부에서 직접 받는 것이 아니라 필리핀 비자센터 등을 거쳐야 한다. 거리도 너무나 멀다. 인천공항에서 미국 JFK 공항, 다시 마이애미 공항을 거쳐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다.
케이만군도는 빌딩이 많지 않고 사회기반시설이 잘 갖춰지지 않아서인지 거리 자체는 잘 사는 곳이란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냥 한국의 소도시 정도랄까. 그나마 높은 빌딩은 세계 유수 기업들이 설립한 회사, 그리고 금융계좌를 관리해 주는 신탁회사, 법률회사, 자산운용사, 스코셔 뱅크 등이 전부였다. 숙박비, 교통비, 레저활동비는 비싼 편이다. 소득세나 법인세와 같은 직접세가 없으니 관광객이 내는 각종 레저활동비에 간접세를 높게 붙이는 것 같다.
케이만군도의 수도인 조지타운에 즐비하게 늘어선 쇼핑센터는 대부분 고가의 명품이나 다이아몬드 매장들이다. 조지타운에서 걸어서 해안가로 갈 수 있고 각종 수상 레포츠를 즐길 수 있다. 영미권 부유층들의 휴양지로 손색이 없다. 거리의 사람들 중 누가 주민이고 누가 관광객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경제적 풍요로움이 느껴졌다. 한국에서는 케이만군도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신기하게도 이곳에선 한국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한국산 자동차, 한국산 휴대폰을 사용하는 사람도 많다.
한국에선 잘 몰라도 그들은 한국 잘 알아
필자는 케이만군도의 한 변호사에게 회사설립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들을 수 있었다. 케이만군도 에서 법인 설립·관리 업무를 하는 그는 법인 설립에 약 300만원이 소요되며 관리비용으로 매년 300만원 정도를 내야 한다고 했다. 회사 설립을 위해 사무실이 필요한 것도 아니며 그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 케이만군도에 올 필요도 없다고 한다. 사무실조차 없는 회사가 실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자기들이 알아서 다 관리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필자에게도 회사 설립을 권했다. 기왕 어렵게 케이만군도까지 왔으니 은행계좌라도 만들고 가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물론 필자는 회사 설립도, 은행계좌 개설도 하지 않았다.
역외탈세 때문에 조세피난처라는 말이 온 국민의 일상어가 돼버렸다.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사람들의 명단이 공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필자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 누구나 조세피난처에서 손쉽게 회사를 설립할 수 있으며 설립 자체는 불법이 아니다. 각국의 세율 차이를 이용해 절세 목적으로 세워지는 경우도 있다. 다만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해 탈세나 재산은닉 장치로 이용하다가 발각된다면 앞서 얘기한 K씨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될 수 있다.
전 세계 조세피난처에 설립돼 있는 유령회사(페이퍼컴퍼니)는 200여만개, 이를 이용한 역외탈세 규모는 20조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얼마 전에는 다국적 기업 애플이 조세피난처를 이용해 90억 달러의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논란이 일었고, 영국 배우 숀 코네리가 세금을 피하기 위해 국적을 바하마로 바꿨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국세청은 앞으로 더 많은 국가들과 금융, 역외탈세 등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겠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국세청이 금융거래 익명성이 보장되는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사람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이 한국거주자인지, 그 회사를 통해 어떤 거래를 했는지, 그것이 절세인지 탈세인지 등을 가려내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국세청이 얼마나 많은 과세를 하고 상대방은 어떤 논리로 방어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