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토분쟁, ‘민족주의’ 넘어서야
<동북아역사재단-아시아엔(The AsiaN) 공동기획>
*편집자 주: 동아시아 지역 안보에 격랑이 일고 있다. 뿌리 깊은 영토분쟁과 민족갈등이 상존하는 가운데 북한 핵 위기 또한 고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당사국인 한국과 중국, 일본 모두 지도부 교체기를 맞아 새로운 질서를 모색 중이다. 아시아엔(The AsiaN)은 동북아역사재단과 공동기획으로 한·중·일 새 정부 출범에 맞춰 동북아 역사현안 및 갈등 해소 방안을 강구하는 국제전문가 기고 시리즈를 마련했다. 총 8회에 걸쳐 한글·영어·중국어·아랍어 등 4개 국어로 게재되는 이 기고 시리즈는 역내 현안에 대한 아시아 각국 전문가·언론인의 깊이 있는 통찰과 분석, 해법을 제시한다.
[동북아현안 국제전문가기고 시리즈]⑦
몇 주 전 중국 북동부 러시아 국경지대의 작고 조용한 도시 투먼(Tumen)에 갔다. 도심 공원에서 이 도시의 연례행사인 눈과 얼음 조각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전시작품 중 가장 큰 조각은 바다 한가운데 몇몇 섬을 묘사한 것이었다. 이는 중국인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모습이었지만, 조각 옆의 안내문은 이에 대한 의심의 여지마저 없애 버렸다. “댜오위다오는 중국 땅이다.”
나는 현재 강의하고 있는 서울의 대학 교정에서 은행 ATM기를 이용할 때마다 기기 전면에 붙어있는 작은 사진과 마주한다. 모든 한국인이 알고 있는, 댜오위다오보다 ?더 작은 이 섬 사진에는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위 두 사례는 현재 동아시아 정세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영토분쟁에 관한 수많은 현상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이 중 하나인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에 관한 분쟁은 국제적으로 중대한 관심을 초래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확대돼 위험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분쟁은 동아시아에서 상당히 일상적인 일이다. 비록 상당수 분쟁이 이해당사국이 아닌 나라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말이다.
동아시아는 위험지대다. 아마도 현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 중 하나일 것이다. 정치적 격정이 중동처럼 지나치거나 폭력적이지는 않지만 실제적 또는 잠재적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이들 동아시아 국가들은 그 국력 자체가?막강하다. 동아시아는 세계 3대 경제대국 중 두 나라가 위치한 곳이다. (그리고 그 양대 경제강국 중국과 일본은 결코 좋은 사이가 아니다.)
상황은 국가간 경쟁관계를 잠재적으로 완화시킬 수 있는 효율적인 지역기구의 부재로 인해 더욱 복잡하게 얽혀 있다. 동아시아는 유럽연합(EU)이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는 다르다. 또 여러 이유로 인해 그러한 기구가 조만간 만들어질 가능성도 낮다.
강력한 경쟁적 민족주의도 작용하고 있다. 유럽에서 민족주의는 20세기 말 이후?이미 소진된 동력원이 되었으며, 중동에서는 종교적, 민족적 성향이 민족주의를?능가하곤 한다. 그럼에도?동아시아에서는 정부 주도의 민족주의가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남아있다.
이는 동아시아가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어리석은 핏빛 싸움으로 물들기 직전의 유럽과 닮아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동아시아 국가들은 극단적인 호전성에 의존하기에는?너무 경제성장에?몰입해 있다거나 경제적 상호 의존도가?높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추론에 따르면 이 지역의 전쟁 발발 가능성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필연적인 결과가 도출된다. 이는 분명 일리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회의적인 시각에서 보면 20세기 유럽에서도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던 적이 있다고 응수할 것이다. 당시 그들도 자본주의 발전과 경제 상호의존성을 근거로 들었다.
만약 동아시아에서 정말로 전쟁이 일어난다면,?그 충돌은 수십년간 이 지역 국가관계에 암운을 드리웠던 많은 영토분쟁 중 하나에서 촉발될 가능성이 높다고 누구든 자신있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격렬한 분쟁은 부동산 가치로 보면 중요성이 덜해 보이는 곳, 대개 작고 인구가 적은 연안의 섬들을 둘러싸고 일어난다. 대부분의 경우 경제적?이해관계가 걸려 있기도 하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생소한 배타적 경제수역(EEZ, EEZ는 1980년대 초에 와서 국제법에 도입된 개념이다)이 설정됨에 따라?바다 한가운데 외딴지역에 위치한 이들 암초 지배권이?잠재적 해양 가치에 대한 배타적 접근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런 영토 관련 주장은 민족주의에 의해 가열되며,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조종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불행하게도) 비양심적인 정치인들은?동아시아에서 확실한 유권자로 간주되는 민족주의자들을 부추기는데 이들 이슈를 악용하기도 한다.
이는 근시안적이고 잠재적으로 위험한 게임이다. 물론 직업정치인들은 자신을 모국의 신성한 국토 수호자로 포장함으로써 득표수를 쉽게 늘릴 수 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점은?제1차 세계대전과 그 밖의 수많은 전쟁들이 이렇게 시작됐다는 점이다. 1914~1918년 사이 발생한 이 분별없는 대량학살은 발칸반도의 사소한 민족주의 대결에서 비롯됐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미래를 위해 영토문제는 가능한 한 자제되어야 한다. 일본과 중국, 한국의 많은 권력자들에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유혹이 아무리 크더라도 말이다. (그런 유혹은 러시아와 필리핀, 태국, 베트남에도 어느 정도 있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민족주의자들의 열광으로부터 얻는 단기간의 이익보다 이 지역의 안정적이고 협력적인 관계로부터 얻게 될 장기간의 이익을 명심해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현재의 실효지배를?분쟁지역에 대한 영유권 판정기준으로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현재 독도/다케시마, 센카쿠/댜오위다오, 난사군도 등 여러 영토분쟁에서 흔히 원용되고 있는?역사적 근거 주장에 대해 회의적일 필요가 있다.?모든 이해당사자들은 아득한 옛날부터 자신들이 해당 영토를 지배해왔다는 증거자료들을(신빙성이 없는 경우가 많다)?찾아내는 것을 좋아한다. 사실 이런 섬들 대다수는 경제적으로 의미 있는?인구를 지탱하기에는 너무 작아서 어느 국가도 영해나 배타적 경제수역이란 개념이 등장하기 전까지는?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동아시아에서 영해라는 개념은?19세기 말 등장했다. 그 이전 동아시아 국가들은 중요한 이익을 창출하지 못하는 영토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근대 이전 시대에 영토란 정해진 경계 안의?지역이?아니라 세금을 매기고 자원을 공출하는 도시와 농촌지역의?네트워크였다.
현재 실효지배의 우선권은?국제사회에서 대부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실효지배를 하고 있는 나라는 평온을 유지하고 상대방이 자신들과 상충되는 주장을 내놓을 때 과도한 대응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는 영국이 지난 30년간?포클랜드(말비나스) 제도에 대해 성공적으로 취해온 전략이다.
이는 물론 한국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한국의 주요 영토분쟁은 일본과 겪고 있는 독도(영어로는 ‘리앙쿠르 암초’)라는 한국의 동쪽 바다에 위치한 작은 섬을 둘러싼 것이다. 이 섬의 역사는 다소 복잡하지만, 지난 60년간?한국의 실효지배 아래 있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한국은 사실상의 소유권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이 항상 그렇게 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일본 정부(또는?일부 말썽많은 정치인들)가?이 섬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되풀이할 때마다?한국 국민과 미디어는 격분한다.
극단적인 예로, 한국의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8월 독도를 방문했다. 표면상으로 이는 독도에 대한 한국의 영유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한국 정치인이 민족주의자들을 격정을 부추기고?단기적 정치적 이익을 얻기 위해?영토분쟁을 이용한 또 하나의 사례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근시안적이다. 한국의 고위 정치인들이 근엄한 성명서를 발표했을 때 그들은 자신이?얻으려 했던 것과 반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논란의 여지 없는 실효지배에 근거해 한국의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는 대신?오히려 한국의 입장을 약화시키고 불필요한 긴장을 초래했다.
보통의 유럽인과 미국인이 한국 대통령의 분쟁지역 방문 사실을 알게 되면, 또는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이 <뉴욕타임즈>에 낸 전면광고를 보게 되면, 그들은 아마도 한국이 불안정한 근거에 기반해 영토 소유권을 주장한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그들은 그렇지 않다면?이렇게 극적이고 값비싼 제스처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이유가 없다고 추론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국익을 위해서는 일본정부 발표에 대해 대통령의 분쟁지역 방문으로 대응하는 대신 조용한 외교적 수사를 통해?유감을 표시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상대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젊거나, 한국대사관의 3등 서기관 정도로 지위가 낮은 사람이 나서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접근법은 한국에게?이익이 되는 한편?역설적으로 다른 나라들에도 이로울 수 있다. 이런 태도가 위험한 민족주의적 격정을 누그러트리고 영토 문제에 대한 긴장을 해소(최소한 조절)할?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영토 문제는 위험하고 잠재적 폭발성이?높은 이슈다. 따라서 모든 관계당사자들이 영토문제를 민족주의적 동원 수단으로 사용하려는?유혹을 억제해야 한다. 문제는 분쟁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나라들이 항상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글=안드레이 란코프/국민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