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민주화 현장엔 ‘와엘 고님’이 있다

1980년생인 와엘 고님(중앙)은 청소년 시절 컴퓨터광이었다. 칼레드 사이드 사건을 접하고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게 됐다. <사진=EPA>

구글 중동·북아프리카 책임자로 일하며 SNS로 민주화혁명 이끌어??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새헌법 선언문을 발표하며 이집트가 다시 혼란의 정국으로 빠져 든 가운데 와엘 고님(Wael Gohnim·33) 활동가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와엘은 SNS를 통해 2011년 이집트 민주화혁명을 촉발시킨 장본인이다. 이후 이집트 민주화에 역행하는 사건만 터지면 SNS로, 몸으로 투쟁 전면부에 나서고 있다. 그는 책 ‘Revolution 2.0’에서 이집트혁명 발발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두바이의 집에 있었다. 작은 서재에서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내가 무슨 일인가 하고 들어왔다. 칼레드 사이드의 사진을 보여주자 아내는 기겁을 하고 물러섰다. 나더러 그 사진을 보지 말라고 했다. 아내는 방에서 나갔지만 나는 계속해서 울었다. 우리 조국의 참혹한 상황과 폭정이 낳은 비극적인 현실 앞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칼레드 사이드의 참혹한 죽음은 이집트가 처한 끔찍한 현실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이런 상식 밖의 불의에 침묵할 수는 없었다. 내가 가진 모든 기량과 경험을 동원해서 칼레드 사이드의 죽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정의를 요구하리라 결심했다. 독재 정권의 사악한 오른팔인 내무부의 부패한 모습을 만천하에 당장 알려야 했다.”

2010년 6월, 와엘 고님은 경찰의 폭행으로 숨진 이집트 청년 칼레드 사이드의 사진을 보고 ‘우리는 칼레드 사이드’라는 제목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든다. 이 사이트는 순식간에 이집트 전역으로 확산됐고 와엘은 이를 주동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 2011년 1월 27일 실종됐다가 2월 7일 이집트 당국에 의해 석방되는 과정에서 이집트 혁명의 기폭제가 됐다.

2011년 노벨평화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기도

이집트는 아직도 민주주의 꽃을 피우는 과정이다. 그 끝이 어떻게 끝날 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래도 그는 이집트의 미래에 대해 낙관한다.

“청년층을 비롯한 이집트 사회의 많은 구성원이 몇 달 전만 해도 엄두도 못 냈을 만한 각종 이슈에 관해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특히 지금은 1500만 명이 인터넷을 이용해 정권의 눈가림에 저항할 수 있게 됐다”

사회 전반의 문제를 고민하는 시민사회 세력의 등장과 국민 절반이 25세 이하인 점도 그가 이집트의 미래를 낙관하는 이유다.

이집트가 고향인 와엘 고님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인터넷 가상세계에서 빠져 살았다. 대학교에 입학해서는 인터넷 통신에 들어가는 전화비를 감당하느라 학업을 포기하면서까지 돈을 벌어야 했을 정도. 졸업 후 인터넷 경험을 살려 정보통신 분야에 진출, 전문가로 성장했다. 2008년에는 구글에 입사해 현재 중동 및 북아프리카 지역 마케팅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구글 회장 에릭 슈미트는 공개석상에서 “그가 자랑스럽다”고 언급하기도 했으며, <타임>은 ‘2011년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명단의 첫머리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 와엘 고님은 존 F. 케네디 재단으로부터 ‘용기 있는 인물’ 상을 받았고, 2011년 노벨평화상 유력 후보로 회자되는 등 세계적인 인사가 됐다.

와엘은 알마 마터 카이로 대학교 졸업 후 카이로의 아메리칸대학교에서 MBA과정을 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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