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변호사란 직업…지식노동과 감정노동 사이에서?

나는 다른 의뢰인들에게도 나는 시간과 지식노동이라는 상품을 팔아 왔다. 평생을 등에 지고 왔던 생업을 내려놓고 이제 지나온 길을 돌이켜 본다. 부자는 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굶어 죽지도 않았다. 고용된 양심도 아니었고 자본주의 첨병도 아니었다. 얼마 전엔 반복에 대한 글을 고등학교 일학년인 손녀에게 카톡으로 보냈다. 손녀가 ‘반복하면서 열심히 살겠습니다’라고 답장을 보냈다.(본문에서) 사진은 감정노동의 전형으로 불리는 전화상담 장면

신문을 보다 낯 뜨거워지는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검사장 출신임을 내 걸고 ‘떼인 돈을 받아 들인다’는 광고였다. 기자는 아무리 광고문구이지만 너무하지 않느냐고 지적하고 있었다. 조폭 출신들이 흔히 쓰던 광고문구였다. 변호사업계가 막장에 이른 것 같다. 사실 노골적이 아니었을 뿐 내면적으로는 전에도 그랬는지도 모른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스물 다섯살무렵 육군 중위의 월급을 시작으로 사십 오년 동안 경제활동을 해 왔다. 그러다 삼년 전 동해 바닷가에 와서 살면서 사실상 변호사 사무실의 문을 닫았다. 나머지 인생은 돈과 관련 없이 내 식대로 살다가 죽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돈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 왔을까. 자식들이나 손자 손녀에게 어떤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먼저 정직한 노동으로 번 돈으로 가족과 먹고 마신다면 그게 가장 좋은 돈의 효용이라고 가르치고 싶다.

육군 대위로 전방에 근무하던 어느 날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철원의 벌판 가운데 있는 바라크 관사에서 살고 있었다. 아내가 우동을 먹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아내를 오도바이 뒷자리에 태우고 비를 맞으며 삼십분을 달려 화지리 읍내 작은 중국 음식점으로 갔었다. 구수한 기름 냄새가 풍기는 집이었다. 김이 피어오르는 따뜻한 우동이 식탁 위에 놓여졌다. 아내와 함께 우동을 사먹고 돌아온 날이 평생 기억에 깊이 새겨져 있다. 우동값은 정직하고 깨끗한 돈이었다.

군에서 제대를 하고 변호사를 시작 할 때였다. 그때도 변호사 업계가 진흙탕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브로커가 판을 쳤다. 교통사고 환자를 소개하고 그 피 값의 반을 빼앗아 브로커와 변호사가 나누어 먹었다. 형사사건도 브로커가 없으면 사건을 맡기가 힘들었다. 변호사마다 받는 가격이 상대방에 따라 그때그때 달랐다. 부자에게 더 받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마음 약한 가난한 사람을 속여 돈을 뜯는 것은 착취같이 보였다. 노력하지 않고 오는 우연한 결론에 따라 성공보수를 받는다는 것은 도박 같았다. 그 반대로 죽겠다고 열심히 일을 해도 의뢰인이 바라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돈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변호사의 보수는 결과에 대한 보수가 아니라 과정에 들인 노동의 댓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러 상대방을 속이는 변호사들이 있었다. 판사를 만나 로비활동을 한다고 거짓말을 해서 돈을 엄청나게 뜯는 변호사들이 있었다. 변호사에게 주는 돈은 아껴도 판사에게 주는 뇌물이라면 돈주머니를 여는 의뢰인들이 많았다.

브로커를 쓰거나 상대를 속이면 뒷맛이 씁쓸하다. 나는 배가 고파도 그렇게는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자존감을 살리기 위해 내 노동의 가치를 스스로 정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스스로를 지식노동자로 정의했다. 시간당 품값과 원고지 한장당 글을 쓰는 단가를 마음속으로 정했다. 거기에 일정 비율을 감정 노동료를 포함시키기로 했다. 그렇게 한 데는 계기가 있었다. 어느 날 친구인 황 변호사 사무실에 들렸더니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변호사인 우리가 돈을 받는 데는 판사한테 당하는 값과 진상 의뢰인한테 고통받는 값이 들어있어야 할 것 같아. 그걸 생각하지 않고 일을 하니까 당하고 나서 화를 내고 고통스러워 하는 거야. 내가 법정에서 선배인 김 변호사가 재판장한테 엄청나게 깨지는 걸 봤어. 김 선배도 정말 자존심을 가진 법관이었는데 얼마나 모욕감이 들었겠어? 더구나 그 재판장은 모자라는 놈으로 소문이 나 있어. 저녁에 퇴근을 할 때도 부인이 시녀같이 대기하고 있다가 바로 대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발로 문을 막 차는 천방지축이라고 하더라구. 부잣집에서 오냐오냐하고 키워 바로 판사를 만들었기 때문에 세상을 모르는 거야. 내가 법정을 나올 때 실컷 깨진 그 선배가 나한테 하는 소리가 이거 다 의뢰인한테 돈 받은 값을 치르는 거라고 하더라구. 그 말을 듣고 진리를 배웠지. 판사들한테 분노하는 것도 그 사람들이 완벽하리라고 기대하니까 화를 내는 거지. 그냥 세상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봐. 화를 낼 일이 없는 거지.”

그 말을 듣고 나는 품값에 감정 노동료를 포함 시키기로 한 것이다.

변호사를 하면서 우연히 돈 벌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재벌그룹의 사건을 맡게 된 것이다. 회장을 만났을 때였다. 그가 호의를 가득 담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비용 문제는 내게 맡겨주시는 게 어떨까? 내가 알아서 넉넉하게 주고 싶은데.”

통이 큰 그는 나의 예상보다 열 배는 더 줄 것 같기도 했다. 순간 나는 생각했다. 부자의 호의에 매달리는 순간 나는 철저하게 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먼저 그에게 물었다.

“그룹에서 거래하는 변호사들도 많고 전관 출신 다른 변호사들도 많은데 왜 나를 선택하려고 하죠?”

나 같은 놈이 선택됐다는 걸 납득 할 수 없었다. 사건을 담당하는 그 그룹의 임원은 내가 못마땅했다. 리베이트를 받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는 내가 사건을 맡는 걸 방해하고 있었다. 회장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잠시 후 그가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지만 내 마음 속으로는 엄변호사를 진짜 친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그가 내게 신뢰를 준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진심으로 일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비용은 내가 정합시다. 지식노동자로 내가 스스로 매긴 시간당 품값이 있어요. 그걸 기준으로 계산해서 나중에 청구할 테니까 그때 돈을 주면 좋겠어요.”

상대방이 재벌이라고 더 돈을 받기도 싫었다. 당당하고 싶었다. 을이 되지 않고 진짜 친구가 되고 싶었다.

나는 다른 의뢰인들에게도 나는 시간과 지식노동이라는 상품을 팔아 왔다. 평생을 등에 지고 왔던 생업을 내려놓고 이제 지나온 길을 돌이켜 본다. 부자는 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굶어 죽지도 않았다. 고용된 양심도 아니었고 자본주의 첨병도 아니었다. 얼마 전엔 반복에 대한 글을 고등학교 일학년인 손녀에게 카톡으로 보냈다. 손녀가 ‘반복하면서 열심히 살겠습니다’라고 답장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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