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마음으로 만나는 살뜰한 영혼의 친구
아파트에서 오래 살았다. 차고 무표정한 단절된 사회였다.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서로 인사를 나누지도 않았다. 이웃의 터무니 없는 고발에 씁쓸한 적도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집 남자에게 인사를 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 남자가 깜짝 놀라 몸을 돌리고 외면을 했다. 자신을 숨기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음날 신문의 인터뷰란에서 그 남자의 사진을 봤다. 사회 유명인사였다. 그 남자는 내가 사는 아파트를 드나들면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싶어 했다. 그 이유는 내가 알 수 없다. 서로 알기를 원하지 않고 익명으로 남고 싶은 게 아파트인 것 같았다.
여러 모임에 부지런히 나간 적이 있었다. 오랜 만에 만난 고교 동창들을 보면 낯설었다. 졸업 후 수십년 동안 다른 길을 걸어왔고 우리는 서로 이방인이 됐다. 공통적인 지적 관심사도 없었다. 학창 시절 대화를 나눈 적도, 공유하는 소년 시절도 없었다. 동창이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친구일까 아니면 지인일까 어린 시절 스쳐 지나간 바람일까…나는 알 수 없었다. 그런 만남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동해의 실버타운에서 2년을 살았다. 거기서 정말 신기한 노인도 봤다. 공동식당에서 옆자리에 앉아 밥을 먹는 노인에게 볼 때마다 인사를 했다. 그런데 한 번도 인사를 받지 않는 노인을 봤다. 그냥 외면하고 묵묵히 자기 밥을 먹는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치매인 것 같지는 않았다. 혼자서 색소폰도 연습하고 셔틀버스 기사와 농담을 하는 것도 봤다. 나를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 인사를 받지 않는 것일까라는 생각도 했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내 가는 길을 가로 막더니 다짜고짜 법적인 의문을 얘기했다. 내가 변호사인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따뜻하고 정다운 인간적인 속성에서 멀어진 노인 같았다.
세상을 살다 보니 건성으로 스치고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인간의 냄새가 사라진 공허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투명인간으로 존재하는 세상이라고 할까.
나는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인생의 노을이 짙어가는 지금에야 좋은 친구가 어떤 것인지 만남이란 무엇인지를 조금 알 것 같다. 진짜 친구는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그리움이 따르고 마음을 함께하는 그런 존재다. 기쁜 일이 있을 때 고통스러울 때 그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사이다. 그런 친구는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얼마 전 한 친구가 간암 진단을 받고 이식수술을 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아픈 느낌이었다. 나는 그를 위해 기도했다. 좋은 친구를 잃을까 봐 걱정이 되고 슬펐다. 수술이 끝나고 그가 회복이 되니까 기뻤다. 고통과 기쁨을 함께 하는 걸 보니까 그는 내 친구가 맞는 것 같았다. 그는 부자였다. 가지고 있는 돈을 더이상 아끼지 말고 잘 쓰라고 권했다. 그는 그렇게 하겠다고 내게 말했다. 내가 권유한 대로 기도 방법으로 시편23편을 열심히 쓰고 있다.
세월의 여과 과정을 거치면서 극소수의 친구만 남은 것 같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해야만 친구가 되는 것일까. 요즈음도 나는 겨울이 다가오는 동해 바닷가에서 매일 작은 글을 써서 민들레씨가 하늘로 퍼지듯 인터넷의 세상으로 날려 보낸다. 내 몸이 아니라 마음을 보내 다른 마음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세상의 많은 마음들이 댓글이 되어 다가와 속삭여 준다. 서로 보지는 못했어도 영혼의 메아리를 서로 주고 받는 게 아닐까.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마음을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사이가 친구가 아닐까.
나는 책을 통해서 많은 마음의 친구를 만들었다. 젊은 시절 다석 류영모 선생의 일지나 법정 스님의 수상을 읽고 영혼의 진동을 느꼈다. 풍산 공원으로 가서 꽃 한 송이가 담긴 화분을 다석 류영모 선생의 비석 앞에 조용히 놓고 왔었다. 또 조계산 산자락에서 법정 스님이 보라색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던 오후 숯이 되어 남은 불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었다. 생전에 한 번 만나지 않았어도 글을 통해 공감하니까 투명하고 살뜰한 영혼의 친구가 된 것 같았다.
나는 요즈음 블로그를 통해 많은 친구들을 얻었다. 그들이 혼을 담아 보내는 댓글을 보면서 마음이 촉촉해 지기도 한다. 영혼의 향기를 교환하는 마음 친구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