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예레미야 33장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렘 33:1)
예레미야는 맘 편하게 두 다리 쭉 뻗고 잠을 청해본 적이 과연 있기나 했을까요? 항상 기뻐하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데(살전 5:16), 예레미야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항상 슬퍼하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삶을 그는 살았습니다.
일생의 대부분을 한탄과 눈물 속에서 보냈습니다. 오해와 무시는 기본이고 감금과 폭행, 살해위협 속에서 살았습니다. 이것이 당시 하나님 앞에서 가장 신실했던 한 사람의 인생이었습니다. 인생 역전이라는 것도 없이 그는 평생을 근심하며 눈물 흘리며 지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많이들 좋아하는 예레미야의 구절입니다.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렘 31:12)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렘 31:17)
예레미야가 선포한 희망적 메세지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의 삶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어쩌면 그 당시에 많은 이들이 예레미야를 비웃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안과 소망이 필요한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예레미야, 바로 당신 아니냐”며 반문하지 않았을까요? 그는 당시의 거짓 선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평안과 소망을 그저 앵무새와 갈이 말하고 다녔던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평안과 소망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을 통해 평안과 소망을 전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평안과 소망의 정의와 기준을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내가 바라는 평안은 무엇이고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평안은 무엇일까 질문해 봅니다.
그가 평생을 근심하며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의 삶의 표면은 눈물자국 투성이었지만, 그의 무게중심에는 진정한 평안과 빼앗기지 않는 기쁨이 있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껏 슬퍼하고 근심할 수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대한 꺼지지 않는 열정이 마치 안전장치처럼 그를 붙들었기에 그는 타인의 고통과 세상의 신음에 안심하고 뛰어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 웃고 있지만 속은 울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뻐서 웃는 것이 아니라 우울해서 웃습니다. 슬픔을 감추려 웃고, 걱정을 잊으려 웃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슬픔과 우울이 빼앗아갈 수 없는 기쁨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껏 울 수 있고, 마음껏 슬퍼하며, 타인의 슬픔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