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넝마주이도 구도자도 혁명가와도 같던 송기원 형…바람 타고 오가던 영혼”
송기원 작가와 고물을 줍다
내가 넝마공동체 초대 총무를 할 때 일이다. 윤구병 교수를 통해 한두 달 밑바닥 삶을 체험해보겠다고 연락이 와서 송기원 형과 1987년 대치동 영동5교 다리 밑에서 한 달간 같이 넝마주이를 했던 적이 있다.
새벽에 일어나 리어카에 대나무 추렁을 싣고 서너 시간 대치동 골목골목 누비며, 빈 박스, 소주병, 고철, 헌옷 등을 주우러 다녔다. 당시 1만~2만원 정도 수입이 되었다. 대치동은 언덕길이 많아 리어카를 끌고다니기가 힘들어 중고 경운기를 이용하여 고물을 줍는 식구들도 있었다.고물을 한 리어카 주워 들어오면 장작불에 찌개를 끊여 아침을 먹고,한잠을 잔 후에 점심쯤에 종류별로 선별작업을 하고, 못쓰는 냉장고나 밥솥, 선풍기 등 전자제품은 잡기(분해하여 고철, 양은,구리, 플라스틱으로 해체를 뜻하는 은어)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였다.
기원 형은 한달쯤 같이 생활을 하였는데, 술이 무지하게 세고, 구라빨도 세고, 거침이 없었다. 마치 거지생활을 오랫동안 해온 듯했다. 당시 청년단체나 대학생들도 가끔씩 한두 달 넝마공동체에서 민중 생활체험을 하다가기도 했는데, 어설프고, 먹물티가 났으나, 기원 형은 그렇지가 않았다. 떠난 뒤 <여성동아> 87년 12월호(?)에 ‘다리 밑의 마르크스’라는 제목의 20여쪽의 글이 실렸다.
원고료를 받았다고 30만원을 가지고 찾아왔다. 아마도 이런 르뽀 글을 쓸만한 적임자였을 것이다. 다리 밑의 마르크스는 윤팔병 넝마공동체 설립자를 그렇게 부른 것이다. 당시 파지 4톤 트럭 한 대분의 무지하게 큰 돈이라 3박4일간 소고기, 돼지고기, 양주까지 다리 밑에서 맘껏 먹고 즐겼다. 일곱살이던 형권이(이후 대치초등학교 입학을 해야하는데 부모가 없어 입학을 못하고 있었는데, 은마아파트에 사시던 이시영 시인이 기꺼이 후견인을 자처해주셨다)도, 바둑이도 포식을 했다. 종태 형이 특히 기원 형과 같이 리어커를 끌고 다녔는데 아주 좋아했다.
이후 실천문학사로 트럭을 가지고 오라고했다. 실천문학사에 반품 들어온 오래된 책, 파손된 책, 못쓰는 잡동사니를 한 차 실어주었다. 그리고 내가 편집해왔던 <넝마공동체> 회지에 실렸던 글들(내가 겪은 삼청교육대 구술증언 5~6명, 부산 형제복지원 구술증언 3~4명, 넝마공동체 식구들의 삶의 구술증언, 난지도 실태조사 등)을 창간하는 <노동문학> 특집호에 싣자고 했다.
실천문학사에 가니, 이문구 발행인도 인사를 시켜줬고, 이호철 소설가도 만나고, 이웃에 있던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 이이화 선생님도 소개시켜 줬다. 그리고 <노동문학> 2호에 나는 ‘깨진그릇도 쓸모가 있다’라는 글을 싣게 되었다. 기원 형은 또 백무산과 이재무 시가 무지하게 좋은데 시집이 잘 안 팔린다고 여러모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송기원 형은 대개의 작가, 지식인들이 넝마주이들과 어울이는 것을 꺼려하거나, 쭈삣거렸는데 워낙 거침이 없고, 넉살도 좋아 우리는 바로 호형호제가 될 수 있었다. 성격도 급하고, 호불호가 분명하고, 엄청난 추진력이 있으면서, 주변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구도자 같기도 하면서, 혁명가 같기도 하고, 돈을 초월한 기개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 육신도 없으니, 더 자유롭게 기존질서를 깨뜨리며, 어디든 바람처럼 달려가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