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홀로서기란 ‘나다움’의 회복입니다”
역대하 24장
요아스는 7세라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됩니다. 어린 왕에게 제사장 여호야다는 정신적 지주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역대하 24:2)
또한 여호야다는 왕의 정신적 지주였을 뿐만 아니라 남유다 전체의 멘토이자 어른이었습니다.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여호와의 전에 항상 번제를 드렸더라”(역대하 24:14)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라는 표현이 씁쓸합니다.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남유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들의 말을 듣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 그 죄로 말미암아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역대하 24:17-18)
남유다와 요아스는 과연 누구를 믿었던 것일까요? 하나님을 의지했던 것이 아니라 한 영적 지도자의 탁월함을 의지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보라는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봤던 것입니다.
미래학자 제레미 러프킨에 의하면 인류역사는 0.1%의 창의적 사람과 그를 알아보는 0.9%의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 이끌어 왔으며, 나머지 99%는 잉여인간입니다. 여기서 잉여인간이란 소수가 일으키는 변화에 이리 저리 이끌려 다니기만 하는 수동적 인간을 뜻합니다.
왕을 포함한 남유다의 대다수 사람들은 어쩌면 잉여인간과 같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가 되는 것입니다. 탁월한 영적 지도자가 이끄는 무리에 속한 익명의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진정한 개인이 되는 것입니다.
홀로 설 줄 아는 사람이 함께 설 줄도 압니다. 홀로서기가 어려운 사람들은 그저 중우를 형성할 뿐입니다. 홀로서기란 ‘나다움’의 회복입니다. 대중 속에 있다 보면 내가 아닌 것을 나로 착각하곤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리로부터 불러내셔서 하나님 앞에 홀로 세우십니다. 내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 앞이야말로 진정한 나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하나님 앞에 홀로 있어봐야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