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 조세형⑮] 기자와 변호사가 짜고 친다면?

“음습한 곳에서 일어나는 국가의 살인을 묵과한다면 일반 시민의 생명과 신체의 자유는 없다.”1960년 4.19혁명의 직접적인 단초가 된 김주열 학생. 그는 최루탄이 눈에 박힌 사체로 떠오른 채 발견됐다.

기자나 작가 그리고 변호사는 남의 말을 듣고 그것을 조립해 글을 만드는 직업이다. 살해되어 매장된 사람의 형제가 찾아왔었다. 죽음을 목격한 옆 감방 사람의 진술을 확보할 수 있었다. 같은 감옥에 있던 대도의 말을 듣기도 했다. 나의 머리 속에는 점점 이런 그림이 구체화 되고 있었다.

1984년 10월 12일 오후 6시. 청송교도소 7사동에 어둠이 밀려들고 있었다. 그곳은 문제수들만 수용하는 특별시설이었다. 서울 남부법원에서 재판 받다가 교도관들을 칼로 위협하고 도주했던 2명과 삼청교육대에서 감시병들의 총을 빼앗아 난사했던 4명 그리고 대도가 수감되어 있었다. 교도소 당국은 그들을 잔혹하게 다루어야 재소자들의 군기가 잡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5명의 교도관이 7사동의 어두운 복도를 순찰하고 있을 때였다. 인기척이 들리자 독방에 있던 박영두가 철창에 대고 소리쳤다.

“나 의무과 좀 보내주이소”

그의 말을 들은 박 교도관의 얼굴에서 묘한 미소가 지어졌다. 교도소 내에서 백대가리라는 별명의 잔인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 알았어.”

그가 감방문을 따라고 옆에 있는 부하직원에게 눈짓했다. 박영두가 나오고 그 옆 감방의 사람도 끌려 나왔다. 두명이 교도관들에 의해 끌려갔다. 사동의 감방은 무거운 정적이 돌았다. 몇 시간 후 피투성이가 된 박영두가 교도관들에 의해 질질 끌려오는 모습이 목격됐다. 교도관들은 본때를 보일 때면 재소자를 지하실로 끌고 갔다. 커다란 마대자루에 사람을 넣고 쇠갈고리로 공중에 매달았다. 그리고 몽둥이와 발길질세례를 퍼부었다. 기절하면 양동이에 든 찬물을 뒤집어 씌우고 또 팼다. 누가 때렸는지 자루 속의 사람은 알 수 없었다. 감방 안에서 그렇게 얻어맞은 박영두의 신음과 한탄이 밤새 흘러나왔다.

“어무이요, 어무이요, 나 죽심더, 살려주이소, 어무이.”

새벽이 되자 갑자기 날카로운 울부짖음이 허공을 찢었다. “야, 이 새끼들아 이것 좀 풀어주라. 나 숨도 못 쉬겠다. 나 죽는다.”

교도관들이 그를 가죽 수갑으로 온몸을 묶어 놓았었다. 담당 교도관이 다가가 철창 사이로 내려다 보면서 말했다. “조용해, 자식아. 뭘 그걸 가지고 엄살이야 엄살이. 왜 맨날 의무과로 보내달라고 보채? 그러니까 맞지.”

교도관이 돌아가자 박영두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어무이요, 저는 이래 죽심더. 어무이요.”

새벽 4시 갑자기 정적이 돌았다. 박영두 죽었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나쁜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맞아 죽어도 되는 것일까. 아프다고 절규하는 사람을 개 잡듯 죽이는 그들은 인간일까. 내가 어렸던 4.19혁명 무렵 경찰이 쏜 최류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학생의 사진을 보고 어른들이 분노했던 기억이 났다. 음습한 곳에서 일어나는 국가의 살인을 묵과한다면 일반 시민의 생명과 신체의 자유는 없다.

법정에서의 문제 제기로 불을 지폈지만 권력의 물벼락을 맞고 그 불이 바로 꺼져버렸다. 정부편을 드는 언론도 많고, 인권 문제에는 시큰둥한 경우가 많았다.

나는 하나님께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슬기로운 방법을 알려달라고 기도했다. 그 응답인지 어느 날 밤 아홉시경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조선일보 사회부의 김 기자입니다. 엄 변호사님 뭐 재미있는 얘기 없습니까? 언론이 너무 진지한 얘기만 하면 독자들이 지루해 해요. 작더라도 뭐 특별한 거 없습니까?”

그 말을 들으면서 갑자기 어떤 생각이 반짝하고 떠올랐다. “특별한 거 주면 내 부탁 한 줄이라도 써줄 수 있어요? 바꿔 먹읍시다.”

“그러죠, 뭡니까?” 기자가 구미가 당기는 것 같았다.

“김종필 국무총리 집에서 대도가 은으로 만든 머리 빗 하나를 가지고 나왔죠. 그런데 그 은빗은 케네디가 선물한 거래요. 지금은 장사하는 평범한 아주머니가 잘 쓰고 있더구만.”

“와, 그거 재미있네” 기자의 흥분한 목소리였다.

“또 하나 있어요. 교도관들이 감옥 안에서 사람을 때려죽이고 암매장한 사실이죠.”
“증거 있습니까?”
“묻힌 장소도 안다니까요. 같이 파볼까?”
“알겠습니다. 마감 시간이라 이만 끊습니다.”

기자의 흥분한 목소리였다. 다음날 조선일보 가십란에 ‘국무총리가 도둑맞은 은빗’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날 오후 국무총리실에서 반박 성명이 나왔다. ‘교도소 내 의문의 죽음’이라는 기사도 떴다. 작은 기사지만 ‘정부의 살인은폐’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주간지들이 그 기사를 받기 시작했다.

Leave a Reply